단나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말은 안 할 뿐. 최정우는 얼굴 위로 올라가는 손을 무의식적으로 잡아챘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앞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는 눈 근처에 닿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단나비가 잡힌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어쩐지 묘한 대치가 벌어졌다.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건 정우였으므로 긴장감은 단 한 사람만의 것이기는 했다. 잡힌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순순히 ...
5월은 가정의 달 D+500, 아방한 초보 아빠와 다 큰 척 하는 애기 “…네가 왜 여기 있냐?” 수연은 문을 열다 말고 현관에 우뚝, 멈춰 섰다. 신발장 앞에 앉아 신발을 신고 있던 내게는 열린 문 너머의 상황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젖혀도 좀처럼 시야가 트이지 않아 나는 급하게 신발 뒤축을 구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잔소리를 좀 듣겠다만, 수연을 저렇게까지 당황하게 한 사람은 누군지, 좀처럼 다른 사람이...
궤도의 오류 그리고 당신은 늘 틀린 길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잖아. 아주 오래전부터 이 행성에 잘못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서 세상의 중력 법칙이 나에게만 잘못 적용된 것 같았거든요. 다른 곳이었으면 어땠을까요? 지구보다 훨씬 무거운, 중력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를테면 목성 같은 곳. 그럼 단단히 붙어있는 두 발이 나에게도 당연했을 텐데……. ⊹ ⊹ ⊹ 해가 떠 있는 듯한 ...
[ 무영 ] 40세, 180cm/84kg [외관] 잘 짜인 단단한 골격, 다정하게 휘어질 줄 아는 눈매, 호의를 담아 당신을 호칭하는 입술이, ……분명 매력적인 이였다. 그는 삼십 대 중반에서 마흔을 막 넘긴 것 같이 보였고, 때에 따라 나이가 조금 헷갈리기도 했다. 날카로운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며 패이는 옅은 눈가 주름에선 유연한 관록이 느껴졌고 가끔씩 냉정하게 다물어진 입술에선 반항적인 냉소가...
서드 드라이버 이용 당한 F1 오후 일곱 시 반. 낯설지 않은 건물에 들어선다. 오래된 플랫에 엘리베이터를 기대해선 안 되므로, 쓸데없이 로비를 헤매는 일 없이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아주 가볍고 빠른 움직임으로 두 칸씩 밟아 오르던 나비는 문득 고작 삼 층짜리 층계를 오르내리며 숨을 헐떡이던 집주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삼 층에 있는 집은 아직 주인이 도착하지 않아 비어 있을 것이다....
Q. 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A. 리우 생일 기념으로 여행가는 것도 보고싶고 겨우살이 밑에서 키스하는 것도 보고싶어요 그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변명의 여지는 있다. 첫 번째로 수연이 사는 동네에서 크리스마스란 어떠한 축제의 성격을 띤다기보단 겨울 공휴일 중 하나에 가까우며, 두 번째론 이십오 일 전후로 좀처럼 집 밖을 나설 수 없게 하는 두 사람의 빡빡한 침대 위 일정 때문이다. 그 이전으로 예쁜 장식, 연말 파티 분위기 따위를 즐...
손풀기 느와르 au 크리스마스 “그건 뭐냐?” 차수연의 시선이 비어 있는 조수석을 향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비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세워진 손잡이에 벨트를 꿰어, 야무지게 차고 있는 케이크 상자가 오늘의 운전 조수였다. 새하얀 상자는 반사된 빛이 반짝거리는, 멋들어진 금박 필기체로 옆면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차에 은근히 밴 담배 냄새 사이로 묘한 단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뭐든...
단 하나의 결론 25.12.25 도로가 한 차선 좁아진다. 통행 차량이 적은 곳이기 때문이다. 한 자치구로 묶이지만, 인구수는 반토막이 난 동네로 들어가는 길.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집. 그곳으로 가는 길이다. 차수연의 세계는 협소하다. 사는 곳과 퍽 비슷한 꼴이다. 그럴듯한 덩치와, 아끼는 사람에게는 간이든 쓸개든 탈부착 가능한 무한 자원처럼 떼어 주는 듯한 마음 씀씀이엔 퍽 어울리지 않...
느와르AU 썰 정리 배경 대충 밑바닥에서 굴러먹던 깡패 새끼들 점점 몸집 불려 가다가 기업 설립하고 고리대금, 건설, 무역 등으로 손 뻗은 사업도 많은… 사람인 척한답시고 지들끼리 회장님 이사님 상무님 이러고 있음. 겉보기엔 번지르한데 뒤에선 온갖 불법적인 일들 자행하고 있는… 본인들은 깨끗한 척하고 애들 데려다가 지들 필요할 때 사람 패고 죽이고 밀수하고 이것저것 할 수 있...
오해의 오해의 오해 필로우 토크는 중요하다. SM플레이에선 더더욱. 손목을 교차한 양손이 머리 위에 놓여있다. 주먹을 쥔 오른손은 힘이 잔뜩 들어가 희게 질려있고, 손가락을 전부 펼친 왼손은 손가락 끝이 간헐적으로 떨린다. 두 손 다 손등이 매트리스에 완전히 눌러 붙게 힘을 주어 누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방 나가떨어질 줄 알았더니. 환자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더라면 각성자가 맞는지 의심할 법한 신체 능력과 연...
최 쫑 19일의 금요일, 한 서른하나쯤의 이상한 세계관 최정우 슬슬 한계였다. 임시로 설치된 천막 아래의 최정우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조금 띄운 채 자연스러움을 연기하며 자세를 고쳐 앉는 시늉을 했다. 딱딱한 의자에 눌릴 때마다 상처가 너무 아팠다. 분명 스팽 세기를 조절하기로 합의를 봤는데, 자신의 디엣 상대는 듣는 척만 했던 게 분명하다. 정우는 손을 들어 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당겨 내려간 소매 밑으로 어딘가에 쓸...
낙하 특사대 전부터 지금과 같은 사이였다면, 어떠한 세계 이제는 한밤의 공기마저 덥다. 초여름에 가까워지는 계절 탓인지 정도를 모르고 들이붓던 싸구려 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술을 깨기는커녕 열이 더 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들어가면 집안 사람들의 걱정을 크게 살 게 뻔했다. 아예 늦은 시간까지 버텨야 할까. 좀처럼 깨지 않을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은 정우는 허리를 깊게 숙인다. ...
불완전의 독점 최정우 X 단나비 조직이 회복하는 속도가 살이 썩어들어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새까맣게 변색된 피부에서 손을 떼었다. 냉정히 말하자면 운이 없었다. 괴이의 저주에 가까운 독성 물질을 해독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조금 더 냉정히 말하자면 간신히 죽음을 미뤄가며 그를 살릴 수 있는 이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얼굴은 본래의 형태와 색을 잃었으나 ...
조각 모음 이미지 파일로 드렸던 것들 2세 쌍둥이 AU 문자 그대로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이 든 아이들을 침대 위로 내려놓는다. 리우가 작은 몸에 두른 팔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단단한 팔 대신 푹신한 이불을 아이들의 목 밑까지 끌어올리자 작은 이불 밖으로 발이 빼꼼 튀어나온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작고 어린 시절부터 사용했던 이불은 표면이 닳아 살갗에 닿는 느낌이 매끄럽다. 가족에 한해...
2024년 크리스마스 디데이, 어드벤트 캘린더st D-6 잘 건조된 세탁물을 거둔다. 양이 많지는 않다. 투박해 보이나 분명 능숙한 손길이 옷가지를 털어 개기 시작한다. 문득 수연은 일 년 동안 꺼내지 않았던 옷의 주인을, 자연스레 따라오는 전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휴가에요?’ 운전에 집중하던 수연이 조수석에 눈길을 준다. ‘소장님이랑 통화하는 거 들어서요.’ 여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응. 내일부터 한...
나와 네가 돌아갈 바다 리환 그 이후 머리카락은 사람을 숨기지 못한다. 어딘가의 사건 현장에 떨어진 흔적이나 잃어버린 혈연을 찾는,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 따위의 얘기가 아니다. 스무 해 가까이를 이 좁은 동네의 미용실에서 보낸 여자의 구부린 손가락이 결 좋은 흑발을 툭툭 털어내듯 훑어내린다. 매끄럽게 얽히는 머리카락은 곧고 가늘다. 하나도 안 닮았네.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온 수연의 머리카락은...
완전한 세계 자립법개론, 그로부터 하루 전 창문을 어설프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차게 식은 방 안 공기는 무거운 습기마저 집어먹어 이불 하나만으로 버틸만한 게 못 됐다. 리우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는 대신 드문드문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는 수연의 품을 비집고 들어가듯 몸을 구겼다. 남들보다 높은 편인 체온을 찾아 살과 관절이 접힌 틈을 찾아 손과 얼굴을 밀어 넣으면 숨결에 불쾌...
그럼에도 날지 못하는 삶을 택한 이들 목차 무성(無聲)의 낙원 세 사람의 이야기 목소리의 질량 궤도 이탈 무성(無聲)의 낙원 좋았어? “…그거 최악의 멘트인 거 알고 있죠?”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는 흉부 위로 나비의 젖은 손가락이 자유롭게 앉았다가 날아오른다. 재밌잖아. 앞뒤를 너무 잘라먹은 말들은 종종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기도 한다. “제 반응이요? 아니...
포로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여러 기준에 근거한 불리한 차별없이 인도적으로 대우하여야 한다. 최정우: 근데 여긴 둘 밖에 없고, 풀려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부끄러워서 어디가서 말도 못 할 테고……. 현관에 들어선다. 익숙한 신발이 보여 잠시 시선을 준다. 여러 번 주의를 주어도 정우의 물건은 종종 제 자리와 모양에서 벗어나 단정한 집안에 눈에 거슬리는 형태로 존재하곤 한다. 나비는 옆으로 넘어져 밑창을 보이는 한 짝을 세우고, 삐딱하게 놓인 반대쪽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나서야 제 군화 끈을 푼다. 정우의 신발 옆, 자연스레 자리를 잡은 군화를 뒤로 한 ...
ㅊㅅㅇ 어느 날은 네가 바다에서 우연처럼 흘러오길 기다렸다 공백이 아니었던 시간보다 공백이 더 길었을 때였다 세상을 한 입에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파도가 치는 어느 날엔 네가 바다에서 우연처럼 흘러오길 기다렸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무성한 소문들의 답신이라도 받고 싶었으므로 여름과 겨울의 너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