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달 전 텅 빈 맹세 입 안이 모래를 씹은 듯 꺼끌거렸다. 살인이며 아카이브 점거 따위의 얘기가 나온 지는 이제 고작 하루 정도가 지났다. 그 얘기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주해우와 그다지 나쁜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사건 이후로는 이상할 정도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거슬린다는 듯 빈정대기에 이쪽도 영 속이 상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케네스 언더우드는 화내지 않는다. 화내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이 좀 더 정확...
7달 전 The Last-Target 이제 와 무슨 생각을 한들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걸음 소리가 울렸다. 처형장 내부는 생각보다 좁고 어두워서 시야가 적응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몇 번 눈을 깜박인 끝에 방 안의 모습이 얼추 윤곽이나마 보이기 시작했을 때, 아마 천장 어드메에 달렸을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직, 잡음이 먼저. 마이크 테스트. 들리는 소리는 익숙한 녀석의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암살자의 코덱스....
7달 전 정방형 경계선 '될 수 있다'고 믿는 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가르친다고? 케네스 언더우드가 앤드류 최의 말을 처음 듣고 한 생각은 이것이다. 어떻게 감히 암살자에게 평범한 삶이란 무엇이고 그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치고 미래를 운운한단 말인가. 케네스 언더우드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조금씩 그 영역만을 넓혀가고 있던 이로서 이에 반발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앤드류 최의 발언이 달콤하게 들린 ...
9달 전 역광 사진을 찍을 때 플래시를 터뜨리는 일은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진, 나를 위한 사진. 특이한 이분류의 이미지 나열 속 제이크 로저스는 디지털 카메라의 데이터 일부를 삭제하며—이것은 두 분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데이터 찌꺼기들이었다—생각했다. 강한 빛과 어둠의 대비는 사진을 살리기도 하지만 때로 죽이기도 한다. 주광색의 백색 폭죽...
10달 전 온기가 있는 식탁 토마토 파스타 두 접시 笑って 笑って 笑って そうやって 웃어줘 웃어줘 웃어줘 그렇게 きっと魔法にかかったように世界は作り変わって 분명 마법에 걸린 듯이 세상은 다시 만들어져 “잘 먹겠습니다.” 타인과 함께하는 식사는 언제나 낯선 것이다. 제이크 로저스는 홀로 산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멸망 전을 포함해서—누군가가 자신이 지내는 공간에 있는 것은 더욱 이상했다. 그게 싫은 감정인가 하면...
10달 전 바다여 바람으로 나는 소망한다. 세계는 2015년, 멸망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형태였고 어떤 향이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 바람이 분다. 앞머리를 흐트러트려 놓은 바람이 휙 하니 지나가면, 2025년, 절망한 내가 있다. 어떤 트라우마는 나을 길 없기도 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란 올까? 제이크 로저스는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갖...
10달 전 반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는 거겠지, 내 ‘행운'이라는 거. 죽을 운명에 운이라는 이름 따위 붙여 뭐하나 싶지만.” 누군가는 행운의 사나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도 행운이냐며 되묻는 것. 이따금 내가 쥐고 태어난 것이 당최 누구의 ‘운'인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즐겁고 행복한 적이 한 순간도 없는데. “그래도 가끔 생각해. ‘내가 정말 ...
10달 전 여섯 번째 장송곡 너무 빠르지 않게 일단, 지금 와서 소렌 이타르라는 사람을 떠올려 보자면 의외로 파장이 맞는 이였다. 그러니까 내향적이라든가, 조용하다든가, 그나마 평범하고, 그나마 상식적이라는 쪽에서. 물론 자신도 그도 ‘평범’과는 어긋난 구석이 한둘쯤 있었으나 그것은 차치해 두고. 제이크 로저스는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데 물렀고 익숙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상처 입고 나면 사람 자...
10달 전 어떤 영원한 것들 미욱한 존재의 영원이라는 모순적인 말 가끔 제이크 로저스는 특정한 장면을 기억했다. 그러니까, 현상된 사진이나 저장된 파일과 같이 오래. 그게 영원히 간직되리라는 허튼 말은 하지 않겠지만, 가끔 어떤 장면은 정말 영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뇌리에 오래 남았다, 그러니까, 포옹의 온기 같은 것. 웃는 낯이나, 부드러운 털의 느낌. 뛰던 심장.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죽을 수 있는 존재들이다. 죽을 ...
10달 전 月光讚揚歌 휘영청 달이 뜬다 길에 나서야겠다 죽어버린 자를 추모하는 건 사실 익숙하지 않다. 이 곳에 와서 몇 번이나 한 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익숙지 않은 일이 능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생존자의 증언도 몇 마디 마음에 박혔으나, 그게 전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제이크 로저스는 결국 결론적으로 어떤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붕 떠서, 단지 다가올 다과회만을 어떠한 처분처럼 기다렸다...
10달 전 Aye aye, captain! 바다의 명대로 뱃머리는 좌현으로, 메인 마스트의 돛을 펴라! 바다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조타수가 타륜을 돌린다. 촤르르륵, 회전하는 방향에 맞춰 뱃머리가 돌아간다. 바람을 맞은 돛이 풍성하게 부풀고, 마스트 위에서 망을 보던 이가 소리친다. 바다라고는 제대로 본 적 없는 치라 해도 이런 저런 미디어의 영향으로 장면 하나 정도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줌...
10달 전 케리논의 바다 거품 이는 파랑을 바라보자면 예전의 세상에 대한 기억은, 누구와도 같이 없다. 제이크 로저스는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생각만으로 부정적인 치였다. 쌓아올린 감각은 부정적이다 못해 끔찍한 것밖에 없으매, 타인을 의심하고자 한다면 끝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네가 ‘너 답게’굴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것으로 된 게 아닌게 싶다. 그러면 말 끄트머리에서 용감하게 명마를 ...
10달 전 Let's set up to…. 조명이 번쩍인다. 시신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상반신만 남은 시신을 보았을 때 제이크 로저스는 그가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며, 그렇기에 절단에 준하는 행위에 있어 고통이나 피 따위가 오갔을 지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지하였으나 비위가 상하는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 사람에게는 생존 본능이 있다. 잔혹하게 살해당한 누군가를 보면, 속이 ... 7
일 년 전 절단된 콰르텟 목 잘린 시체와 만찬 사이의 사중주 피사체는 30도 각도로. 조리개를 열고, 버튼을 누르면 셔터가 닫힌다. 찰칵, 선명한 촬영음. 제이크 로저스는 사진 촬영에 취미가 없다. 다른 피사체를 찍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을 찍는 것조차. 따로 사진기를 가져본 적은 없고, 휴대폰조차 화질이 나쁜 구식을 주로 사용하곤 했다. 무언가를 선명하게 볼수록 멀미가 나는 것 같다는 감각이 늘 주를 이루었기에,...
일 년 전 Sing, as if you're not going to die…. 비 냄새가 났다. 파르르르, 허공을 돌며 펼쳐져 내려오던 어떤 천, 섬유, 혹은 무언지 모를 원단의 집합체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말입니다몽, 서로서로 죽여야 한다는 거예요몽! 아까 테루몽이 떠들어댔던 말은, 정확하지 않은 조합으로 수시로 머릿속을 채웠다. 불쑥불쑥 파고드는 톤 높은 목소리의 환청이 달갑지 않아 제이크 로저스는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 11
일 년 전 파랑의 이름 한겨울의 바다라는 건 때로 영혼을 닮았다. 우라는 문득 시리게 바람이 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베란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방 안은 따뜻했다. 하지만 어쩐지 맞지도 않은 저 바람이 칼바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흩날리지도 않는 백색 머리가 어쩐지 물이라도 먹은 듯이 무겁게 느껴졌다. 바다의, 소금기일 터였다. 방 안은 넓었다. 대체로 고급스러운 화이트와 우드 톤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창문가에 ...
일 년 전 저무는 해 덥고 습한 바람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조명은 더이상 밝지 않았다. 깜박거리는 주홍빛 불 아래, 서 있던 인영들조차 각자 할 일을 찾아, 해야 하는 일을 따라 흩어졌다. 그 사이에 이치노세 아타카는 미아처럼 서 있었다. 할 일과 해야 하는 일과 또한 할 수 있는 일 따위가 거미줄처럼 얽힌 교차로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어쩌면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는데도 목 안에서 울컥 차오르는 울음... 12
일 년 전 오선지 아버지, 저 마왕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이 곳에서의 생활에 어쩌면 이치노세 아타카는 원만하게 적응해가고 있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충격이 내리꽂히니, 어찌 할 도리를 모르고 패닉에 빠진 것을 보면.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소원, 시체, 재판. 혼돈에 잠긴 머릿속의 주제는 대체로 저 세 가지로 귀결되었으나. 그러나 언제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답을 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치노세 ...
일 년 전 반환점, 반복 존재하지 않는 어떤 도돌이표를 기억하듯이. 깜빡. 전등이 일순 꺼졌다 켜진 듯한 착각이 든다. 아마 다시 켜진 것은 불 대신 제 정신일 것이다. 흐릿하니 안개가 껴서 해무 위를 헤매는 유령선 같던 정신이 조금 제 자리를 찾아온 듯이. 이치노세 아타카는 고개를 들었다. 연분홍빛의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장막 너머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울고 있는 저를 달래듯이 손을 뻗어 어색하게 토닥이고 있는, 실루엣...
일 년 전 이명의 잔재 폭음이 아직도 귓가에…. 이치노세 아타카는 마츠 타다리를 기억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렇게 되기 전의 모습 정도는 충분히. 아니, 알았던가? 그를 기억하던가? 핏자국과 조각 따위를 본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문을 열고, 그 뒤에— 한참이나 주저앉아 있는 체육관 바닥은 여전히 미적지근해질 기미조차 없이 차가웠다. 옷자락에는 검댕과 피 따위가 튀어 얼룩이 져 있었는데,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