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량무현] 초록의 실루엣 밖으로 나가자마자 실내보다 더운 공기가 얼굴을 덮쳤다. 답답한 느낌에 숨을 길게 내쉬기도 잠시, 피부와 머리칼에 휘감기는 선들바람이 감각을 반전시켰다. 빌딩 구석구석을 흐르는 그것은 적절한 습기가 밴 대기를 가볍게 섞었다. 지중해를 옮겨 놓은 하늘에는 구름도 마치 거품처럼 드문드문 눈에 띌 뿐이라 투명한 햇살은 거리낌없이 땡볕을 쏟아부었다. 짧고 비뚜름한 ...
[해량무현] 이상한 것 가져온 사료와 간식, 장난감, 화장실 모래를 비롯해 며칠간 필요한 물품들을 내려놓은 박무현이 마지막으로 이동장에서 고양이를 꺼냈다. 낯선 거실에 안착한 고양이는 바짝 곤두서서 구석으로 도망쳤다. 경계 태세로 주변을 살피는 모습에 박무현의 표정은 아기를 남의 집 대문 앞에 두고 돌아서야 하는 사람처럼 변했으나 이내 이쪽을 돌아보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다...
[해량무현] 소금으로 된 남자 해저 기지에서 나온 이후로 가끔 반복해 꾸는 꿈이 있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텅 빈 장소인데 바닷가에서 맡을 수 있는 짠 냄새가 희미하게 떠다니고 동이 트기 직전처럼 아주 파르무레한 미광이 물처럼 고르게 번져 있습니다. 꿈속에서 눈을 뜨면 제 앞에는 잿빛 입자가 선을 이루어 경계를 나타내는 좁다란 외길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좌우가 탁 트였는데도 길을 벗어나...
[서현세건] 어둠이 걷히기 전에 “물냉 둘에 고기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주동철은 테이블에 그릇을 차례로 내려두면서 몰래 손님 둘을 흘끔거렸다. 두 남자는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험한 지역에서 장사를 하는 까닭에 얼굴에 자상을 입은 흉터가 있거나 팔다리에 문신이 가득한 손님이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 이들에 비하면 두 남자는 외적으로 평범한 축에 속했...
[해량무현] 겹 왼손 검지에 생긴 상처를 발견했다. 손을 씻던 중 통각이 가리킨 불그스름한 흔적. 무언가에 찍히거나 긁힌 것처럼 피부 표면이 동그랗게 까져서 언뜻 점으로 보였다. 언제 났는지 모를 이런 상처가 대부분 그렇듯이 몰랐을 때는 아픔도 없는데 인지한 순간부터는 자꾸 쓰리고 신경이 쏠린다. 병원에 비치한 구급상자를 꺼내 보았다. 각종 상비약, 지혈제, 거즈, 붕대 ...
[서현세건] 향기 분자의 항구적 지속성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분명 학교에 가 있겠다고 말했는데도 함수현과 여민형은 훈련장에 돌아와서 만날 것처럼 인사하고 나갔다. 물건을 전한 남하진도 애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고요해진 2.5층에 혼자 남은 한세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들이 간밤에 덮고 잔 이불이 매트에 대강 뭉쳐진 채 널렸다. 세 명이 어제저녁 내리 훈련...
[란지보리] 처음 가요합작 참여 아노마라드를 뒤덮었던 겨울이 한 발씩 뒷걸음질하는 시기였으나 추위는 여전했다. 란지에는 어둠이 깔린 벨노어 성 복도를 소리 죽여 걷다가 무심코 차가운 손을 문질렀다. 항상 건조한 냉기에 노출된 탓에 피부가 터서 손등이 약간 까칠했다. 란지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루하루 남을 돌보는 일만 하는 시종의 손이 보드라우면 그게 더 이상했다. 오히려 다른 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