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케이]녹는점 26. 07. 디페스타 배포 늦은 밤의 교사는 유난히 어두웠다. 한낮의 생기를 모조리 빨아들인 것처럼. 개중에서도 평범한 학생들은 좀처럼 발을 들일 일 없는 복도 끝자락에는 일말의 온기조차 없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이래서야 흔히 학교를 떠도는 유령 소문의 존재가 놀랍지 않을 판이다. 물론 여기서 유령 후보를 꼽으라면 단연 자신이겠지만. 어쩌겠는가, 깜빡 잠들어버린 것을 깨워 돌려보내 ... 36
[쿠로케이] 날개옷에는 바느질 자국이 있다. 26. 05. 31. 쿠로케이 웨딩합작 촬영용 스튜디오의 뒤편, 모델 한 명만을 위해 마련된 분장실은 답지 않게 널찍하면서도 조용했다. 쓰임에 걸맞게 한쪽 면이 전부 거울로 도배된 방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어서, 결국 포기한 기색으로 어깨를 늘어트린 하스미는 얌전히 정면을 직시했다. “허리 조금만 더 펴, 하스미. 자락이 구겨진다.” 이어지는 말에야 흠칫 허리가 펴졌다. ... 56
[쿠로케이] 시선의 너머 뚝. 튀는 노이즈를 마지막으로 노랫소리가 끊어졌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쉰다. 파르라니 떨리는 호흡에도 다리는 뻣뻣했지만 이 이상 버텨봐야 꼴사납기만 할 뿐이라는 것은 알았다. 결국 꺾어지는 무릎을 바닥에 꿇고 비스듬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직까지 버티고 선 상대가 아니라, 제대로 시선이 닿지도 않는, 관객석 한구석의 푸른 인영을 향해. 기실 진정... 27
[쿠로케이] 집 안에는 부글부글 거품이 끓는 소리가 가득했다. 툭, 발치로 가지고 들어온 짐가방을 떨어트리고 나서야 부엌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나리, 왔어? 손 씻고 이리 와. 응, 하고 나서야 하스미 케이토는 한발 늦게 끓는 소리의 향기를 자각했다. 카레였다. 오늘 저녁인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끓이면 되니까 앉아 있어.” 뚝뚝 물이 떨어지는 손을 닦아내고 오...
[쿠로케이] 피에 담긴 것 * 유구의 귀신◆스칼렛 할로윈의 날조와 의상, 컨셉 관련 개인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 다 됐다.” 어깨에 걸친 외투를 고정시키고, 이리저리 구슬끈이 늘어진 브로치를 들여다보던 키류가 고개를 들었다. 공연 당일은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리허설 직전엔 역시 시간이 빠듯하다. 아무리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지만, 조금...
[쿠로케이] 춘풍화기春風和氣 왁자하던 공기가 한풀 가라앉았다. 모일 때 그랬듯 빠르게 흩어진 사람들에 운동장이 텅 비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햇살을 피해 나무 밑에 선 하스미가 말없이 교장을 올려다보았다. 3년이었다. 그것은 쉬이 모든 것을 털어내고 돌아설 수 있을 만큼 짧지도, 평생을 벗어나지 않고 머물러야 할 만큼 길지도 않다. 당연히 흐르는 시간...
[쿠로케이] 전력모음 #쿠로케이_전력60 * 눈물 하스미 케이토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불이 꺼져 어두운 연습실엔 먹먹하게 잠긴 공기가 고여있다. 이 방만 한 움쿰,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불청객을 밀어내는 공기를 헤치며 성큼 발을 들인 키류가 하스미의 눈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걸음을 붙잡고 발을 늘인 게 과연 형체 없는 방해물인지, 아니면 제 망설임인지는 모르겠지만. 'S1'...
[쿠로케이] 반석의 기둥 #쿠로케이_전력60 전력주제: 낮잠 변화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예상하던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그렇다. 가령 학생회장이란 자리는 이사라 마오에게 있어 언젠가 다가올 흐름과 같았다. 올라탄 이상 멈출 방법이 없는 흐름. 오늘의 나는 어제와 한없이 다르지 않고, 제게는 황제의 위광을 뒤집어쓸 방법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절대적이라는 권력마저 이제...
[쿠로케이] 달이 앉은 거리 언더닥터 × 차이나타운 * 최대한 순화하려 노력했지만, 다소 잔인하고 부도덕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AU 농도가 짙습니다. 뭐든 괜찮으신 분만 ↓↓↓ 계단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지하에 울렸다. 기다려 마지않던 걸음이었다. 쥐고 있던 바늘을 내려놓고 문가에 섰다. 천연덕스럽게 코트를 받아들고, 물 흐르듯 하나뿐인 의자로 안내한다.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그것이었다. 그러...
[쿠로케이] 단문모음 * 전력주제: 도시락 - 전력: '인스턴트'에서 이어집니다. “나리, 나 들어간다.” 똑똑. 대강 문을 두드렸다. 답변을 듣지 않고 열어젖힌 문은 아직 길이 들지 않아 거친 쇳소리를 냈다. 귀를 찌르는 소음에 문득 손을 멈춘 키류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진짜 회의가 있는 날엔 지각도 못 할 판이다. 도중에 이런 소리를 내며 등장하면 모두가 이쪽을...
[쿠로케이] 단문모음 2 * 피어스 “정말 괜찮겠어?” “그래. 괜찮으니까 빨리 해라.” 줄곧 단정한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것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못내 가슴이 술렁였다. 우물쭈물하며 움직이지 못하는 키류 대신 한껏 한숨을 내쉰 하스미가 옆자리의 의자를 뽑아 제 앞에 끌어놓았다. 무언의 재촉이다. 슬슬 차오르기 시작한 짜증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는 빤한 키류가 결국 자...
[쿠로케이] 낙목한천 落木寒天 하스미와 키류가 건물을 나선 건 예상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솟아오른 건물의 그림자를 한 몸에 받으며 하스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손으로 모든 걸 좌지우지하던 학교라는 사회가 얼마나 좁디좁은 곳이었는지를 비로소 체감하면서. 이미 다 정해져 있는 일을 이렇게까지 질질 끌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뭔지. 물론 과정과 절차는 어디서나 중요하다....
[쿠로케이] 묻혀 있는 것 "나는 아직 이대로 넘어가지 못하겠다, 키류."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하스미가 말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후 내내, 아니 무대에 섰을 때부터 줄곧 저런 상태다. 오키나와의 SS 예선 무대 위에서 키류의 옷을 입지 못 했다는 이유였다. 하스미의 이런 열성적인 사랑은 곧잘 알고 있었지만, 겪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수줍어지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머쓱한 기분으로 가...
[쿠로케이] 숨결의 무게 언더닥터 × 차이나타운 / '달이 앉은 거리' 속편 * 유혈 묘사 주의 * 역시 AU 농도가 짙습니다... 뭐든 괜찮으신 분만 ↓↓↓ 보슬보슬 내리는 빗방울이 우산에 맺혀 흘러내렸다. 붉은 방수천 너머로 토독거리는 물방울의 소리가 경쾌했다. 어쩐지 즐거운 예감이 들었다. 축축했던 고통과 살갗을 누르던 옷자락의 찝찝함마저 한겹 기쁨으로 덮어씌워진 탓이다. 언제부턴가 키류에게 비 오는 날은 그런 의미가 되었다....
[쿠로케이] 막이 내린 뒤 『Fine』의 마지막 무대가 끝났다. 화려한 휘장이 둘러쳐짐과 동시에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써 내려온 이야기가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이야기의 완결과 동시에 주역들은 퇴장했다. 갈아엎은 폐허와 빈 땅을 남겨두고. 불이 꺼진 무대 뒤, 실려 간 텐쇼인을 대신해 자리를 지킨 건 다름 아닌 부회장 하스미 케이토였다. 라이브의 시작부터 굳건히 서 있...
[쿠로케이] 잃은 것, 남은 것 * 하스미를 향한 괴롭힘이 조금 묘사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어왔다 나가고 쫓겨나며 초대받는 ES에서 경비가 엄격한 곳을 꼽으라면 여러 곳을 댈 수 있지만, 의상실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할 것이다. 비단 아이돌의 팬이라면 누구나 눈에 불을 켜고 탐낼만한 사적인 소지품들이 모이는 곳이어서만은 아니고, 단순히 값나가는 물건들이 보란 듯이 전...
[쿠로케이] 사랑의 향기는 졸업 후, 학교 내로 한정되어있던 아이돌 활동을 종료하고 사회로 나가게 된 후 전과 가장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좀 더 다양한 일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일이 잘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지고 연예계의 참담한 이면 같은 것들을 보고 겪은 지금 홍월은 나름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내레이션 녹음이나 심야 라디오, 퀴...
[쿠로케이] 죄와 침묵 2학년 한여름의 하늘은 푸르고 구름이 많았다. 습한 열기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뚝뚝 땀이 떨어지는 날씨였다. 관성적인 손부채질을 하며 계단을 오르던 키류는 어딘가 몽롱한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덥다, 라고. 누구라도 이런 날씨에 땡볕 아래로는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키류도 마찬가지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무대 위를 장식할 주인공이라면 선택의 ... 12
[쿠로케이] 단문모음 3 - 반지 “멋있었어.” 주렁주렁 늘어진 체인을 한데 모아 손에 쥔 키류가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비치된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던 하스미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의미를 알 것만 같아 짧게 웃음을 터트린 키류가 이내 멈춘 말을 이었다. “라이브 말이야. 아직 감상을 말 안 한 것 같아서.” 하스미 케이토의 솔로 라이브 1일차는 성황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