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달 전 히어로님, 이제 퇴근 시간이에요 사법라라 신입 히어로는 기지캐를 키며 의자 뒤로 등을 완전히 기댔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고서 쓰니 몸이 말도 안 되게 쑤셨다. 모르고 입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입에게 시킬만한 일들이 아닌 거까지 오는 걸 보니 유산지가 인력 부족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쉰 신입은 삐걱대는 관절을 꺾어댔다. “……아, ……니다.” “아이, ……말고...
22일 전 오늘도 주인님? 늘 그렇듯 야한 건 나오지도 않음 이안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눈앞의 컴퓨터를 노려봤다. 이 원수 같은 고물은 지금 제 인생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왜…… 뭐가 문제야, 제발, 내가 오이도 먹잖아……. 그러나 그렇게 빈 게 무색하게도 이안은 결국 블루스크린이 뜨고야 만 컴퓨터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아, 진짜 되는 일이 없어.” 하…….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게임용 의자에 푹 파...
7달 전 발렌타인 데이 30분 전력 ㄱㅂㅈㄱ 달그락, 달그락. 이안은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에 피카와 뒹굴다 늦게 잠들어서 그런가, 부은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게으르게 하품을 한 번 한 그는 달콤한 초콜릿 냄새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단 것을 좋아하는 이안은 초콜릿이라면 종류를 거의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기분 좋게 웃으며 방 밖으로 나간 이안은 가스렌지 앞에 서 있는 피카를 ...
9달 전 꿈, 죽음? 단우는 순식간에 지나간 칼바람에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와 다른 바람이었다. 그래, 이상했다. 추위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몸을 관통하는 환상통이 느껴질 만큼. 단우는 팔을 쓸었다. 어쩐지 살이 에일 듯한 착각에, 죽음의 냄새가 몰려오는 듯한 착각에……. 피? 아니야, 아냐, 난 여기에 있어, 총은 날 겨누지 않고, 유산지는 내 눈앞에 없고, ……없나?...
9달 전 가족 생경한 것, 어려운 것, 사랑을, 사랑을? 단우가 해진에게 형이 되어달라 말한 것은 어린아이 같은 무의식의 발로였다. 언제나 혼자서 모든 것을 헤쳐나가거나,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일이 잦았던 그는 유아기를 제외하고서는 한평생 홀로서기를 해온 사람이었다. 아무리 곰은 단독 행동을 즐겨하고 무리를 이루는 일이 없다지만, 단우는 곰의 껍데기를 쓴 인간이었다. 산 속에 들어가서 동물의 본능만을 뒤집어 쓰...
9달 전 고록 전오늘밤피카를쟁취할겁니다 언제부터인가 이안의 시선 끝에는 피카가 걸려 있었다. 호그와트에서부터 시작한 그 시선은 졸업하고 나서도, 동거 중에도, 후에도, 그리고 전쟁에서 재회했을 때까지도 유지되었다. 피카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은근히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았을 때, 아마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서도 동거를 아무 말 없이 혼자서 끝내버린 건 정말 개자식 ...
6달 전 행복을 불러오는 고양이 오리진 종전 후, 자그마치 3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매우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머글들의 캐럴이 울려 퍼지고 길가에 크리스마스트리가 크게 세워져 있었다. 트리 꼭대기에 달린 별은 마치 피카를 환영하듯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 노래가 런던 거리에 울려 퍼졌다. 한 밴드가 ...
9달 전 낙 부유감. 끝없는 부유감. 단우는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굉장히 포근한 느낌이 들었는데.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신기루처럼 흩어져 더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늘 찾아오던 안정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멋대로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단우는 잘 떠지지 않는 눈가를 비비며 바닥을 더듬었다...
일 년 전 담품아 언젠가의 이야기 우담은 꼬리로 바닥을 느긋하게 쓸었다. 오랜만에 가지는 자유로운 개인 시간이었다. 물론 호출에 대비해서 퇴근도 하지 못하고 유산지 건물 내에서 대기 중이기는 하나, 이 정도가 어딘가.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유산지는 베테랑일수록 이러한 개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적어도 휴가를 내지 않고 자유를 누리기는 힘들었다. 그처럼 위치추적기를 달고 있는 히어로라면 더...
일 년 전 돌담 if 유산돌 호담 델피스는 비장한 표정으로 승강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갔다. 보통 같으면 긴장 푼다는 명목으로 농담 따먹기를 했을 동료들도 이번만큼은 조용했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도착한 승강장은 아직 텅 비어 있었다. 호일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주변을 경계하던 유산지 히어로들은 사방을 뒤흔드는 폭음과 진동에 몸을 낮추고 습격에 대비했다. 건너편 승강장에서...
일 년 전 내 친구, 대체 뭘 바라는 건가요? 헌정 to 마로킨 “마로킨,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네, 말해요.” “유산지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아요?” “……뭐라고요?” 가끔 생각하는 건데, 마로킨은 호일에 잘 안 맞는 거 같아서요. 뜬금없이 건네진 말에 마로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불쾌 지수가 차올랐다.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우담 씨가 마로킨한테 돌아오라고 하길래요.” 지금 남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
9달 전 불행한 아이들아, 단우&이안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안나 카레리나, 레프 톨스토이 作 행복한 이는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이는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행복한 이는 가정이 화목해서, 삶이 순탄해서, 그런 이유로 행복하다. 불행한 이는 부모가 없어서, 배신 당해서, 가족이 죽어서, 돈이 없어서, 구원 삼은 사람이 떠나버려서, 행...
21일 전 오리진 동거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고요 까치까치 설날은 그저께래요 “피카, 피카!” “왜 부르셔?” 들뜬 채로 방문을 벌컥 연 이안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피카는 와서 앉으라며 침대를 툭툭 두들겼다. 사양하지 않고 가까이 온 이안은 벌러덩 누워 옆에 있는 이에게 책자를 건넸다. 손에 들고 있던 책자는 이미 여러 번 읽었는지 구깃구깃해져 있었다. 책을 읽는다며 침대에 앉아 있던 피카는 동거인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9달 전 레시스&레니에 3탄 짹짹. 짹짹짹. 새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햇살 특유의 쨍한 햇볕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암막 커튼을 걷은 듯했다. 익숙한 서류들의 산이 보이기 전까지는 레시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 숙소에 있는 서류들은 오로지 기밀문서들뿐이었다. 외부인에게 그 내용을 보인 것은 마법 내부 규율로 인해 즉결 처분까지 가능한 사유였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불쌍한...
6달 전 레시스&레니에 2탄 “혹시 레니에 경 있으신가요?” “아, 레시스 님. 단장님! 이분 또 길 잃으셨대요!” “……!” 그, 그걸 그렇게 공개적으로 외치시면 전……! 레시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저를 본 기사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들려서 더 창피했다. 차마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맞다고 하지도 못하는, 그런 곤란한 처지란. 레니에도 피식 웃으면서 다...
6달 전 레시스&레니에 1탄 “아, 흐, 거, 윽, 거기…….” 하늘색 머리의 사내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의 손에 머리를 비비며 차오르는 성감을 견뎠다. 애교라면 애교고, 아양이라면 아양인 몸짓에 남자는 옅게 웃었다. “더 만져, 읏, 달라고?” “응, 응…….”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등발의 남자는 밑에 깔린 사내에...
일 년 전 미움을 담아, 단우가. 단우 사망로그를 가장한 과거로그 내 어릴 적 기억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광경으로 시작한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를 부모님이 아래에서 지켜보며 박장대소하고 있는 장면이다. 아마도 열매 하나 먹겠다고 키에 비해 높은 나무 위까지 올라간 자식이 웃겼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날 나무 위에 곧잘 올려놓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지러지며 버둥거렸다. 당연하게도, 처음에 올라갔다가 못 내...
일 년 전 내가 가져갈래요. 데미 추모로그 늦은 밤. 첫 번째 전투를 하루 앞두고 승강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던 날이었다. 뒤숭숭함을 끌어안고 모두가 자리를 깔고 잠이 든 시각. 데미는 승강장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반대편 승강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을 고스란히 맞는 유산지 쪽과는 달리, 호일 쪽은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그래서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잘 보이지 않...
일 년 전 할로윈,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날. 유산지 소속 히어로들은 이맘때쯤이면 누군가를 기다린다. 10년 전, 그 워크숍을 참석한 이들이라면 특히나. 그들은 유산지 내에서 히어로들 기수 중 황금 기수라고 불리며, 동시에 불명예 기수로도 불린다. 그 어느 기수들보다도 탁월한 업무 성과를 자랑하면서도 전대 서장의 죽음 후 호일로 귀순한 히어로들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물론 호일로 귀순한 히어로들은 모두...
10달 전 if 단우 사망 언젠가의 이야기, 그리고 가능성 “왜 나 이해 안 해줘요? 내가 겪어온 삶이 이런데, 내가 인간들을 좀 싫어해도 괜찮은 거 아닌가? 당신만큼은 날 이해해 줘야지, 당신은.” 언젠가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날도 한참 우담과 단우 사이에 언쟁이 오가던 사이였다. 며칠 전에 단우가 퇴사 의사를 밝혔기에 좀 더 격화된 싸움이었다. 그와 같은 기수 히어로라면 퇴사 후 단우가 어디로 갈지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