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달 전 죽은 자들의 화원 이곳은 안식처이다. 안식이란 곧 죽음을 뜻했고, 이윽고 숨을 쉬지 않게 된 생명은 거센 물살 타고 흘러가듯 세계를 넘어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누군가는 이곳을 사후세계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이곳을 죽은 자들의 화원이라고 불렀으며, 또한 누군가는 이곳을 무덤의 세계라고 불렀다. 이 세계는, 살아있는 것보다 죽은 것이 더 많은 세계였다. 관을 이고 걷는 ...
하루 전 세상의 첫 번째 꿈 ‘꿈’은 고요한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의 그림자, 혹은 무의식을 어루만지는 손길과 같았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한곳에 머무를 때,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꿈은, 모든 무의식을 유영하는 존재를 바라본다. 이윽고 무의식의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꿈 밖으로 안내한다. 이 기묘한 꿈의 세계는 넓고 공허하며, 또한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지...
일 년 전 말소된 슬픔 고통 없이는 방향키를 잃은 배와 같아서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진다. 온몸에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고, 눈앞을 허옇게 물들이는 감각이 신체의 말단 부위까지 퍼진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의지의 표명은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아서 하는 것도 아니었고, 힘들지 않아서 하는 것도 아니었고, 세간에서 부르는 것처럼 불패의 전사라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포기할 수 ...
일 년 전 아득한 추억을 짊어지고 분홍 실바람이 돌연 강렬한 흐름이 되었다가 금방 멈춘다. 주변에 퍼진 인식 저해의 마법 사이까지 바람이 들어가고, 초침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리는 곳의 끝에 도달한다. 폭풍의 눈 한가운데서 벤라토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온다. 카페의 문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연다. 워낙 특수한 곳에 있던 곳이라 사람이 없었다. 카페 주인인 타니엘은 벤라토멘을 보고 여상한 ...
일 년 전 버려진 이들을 위한 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 곳이 있었다. 행복한 기억과 추억 모두 이승에 있다. 그리 말하면 필시 거짓말일 터였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생이었다. 기민하고 똑똑한 것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저주처럼 여겨졌다. 젖먹이를 버린 부모는 자신들이 죽어간다는 이유만으로 버린 것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저승에 다...
일 년 전 낯선 생명과 웃음 카멜은 홀로 모든 곳을 유영한다. 다른 행성이나 우주, 도달하기 힘든 곳까지. 특별한 자격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쉽게 허락을 얻어 들어가곤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소음에서 노래와 언어를 찾을 수 있다는 특수성이 카멜을 먼 곳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카멜은 자신의 능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기꺼웠다. 자신도 그런 다정에 기대어 살...
일 년 전 마른 흰 장미 밤하늘의 장막을 닮은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 위에 부드러운 달빛이 내려앉았다. 별마저 사라진 광막한 하늘에는 달 하나만이 휘영청 떠 있었다. 찬란하게도 빛나는 단 하나의 빛이 마치 황홀경처럼 소용돌이친다. 붉은 보석 빛깔의 눈은 지독하게 아름다웠던 동시에 흐리기만 했다. 낮의 하늘은 빛을 잃은 잿빛이건만 밤의 하늘은 왜 이리도 마음 시리게 아름다운지 알 수 ...
일 년 전 찰나의 미련은 영원이 되어 내 생에 함께한 미련함과 다정함이여, 비루한 생의 평생의 친구여, 나는 네게 영원불멸한 작별을 고한다. 온몸에서 황금의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루이셸은 손끝으로 허공에 그림을 그린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파란 빛이 점차 하늘을 가를 것처럼 빛나고, 곧 푸른색 빛과 황금의 아지랑이가 뒤섞여 팔을 집어삼킨다. 잿빛의 하늘에 파랑이 퍼진다. 전신에서 격통이 느껴진...
일 년 전 추위와 고통의 신 첫 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엘프인 어머니와 인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탄생과 함께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원한을 살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하려다 죽었고, 아버지는 다른 엘프에게 살해당했다. 다른 종족과의 교류가 엄격하게 금지된 엘프였기 때문인 탓이다.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일 년 전 최후의 생존자 폴아웃 리퀘스트 전쟁이 있었고, 모든 것이 한 줌의 흙먼지로 바뀌었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 살아있다, 그 말이 쓸모를 가지기에는 이 모든 분쟁과 다툼과 폭력으로밖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가치가 없었다. 그들은 서서히 자멸의 길을 걷는다. 모든 시설이 노후화된다. 노후화된 것을 고칠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 한 볼트의 최후...
8달 전 신의 모습 잘 보아라! 탐욕의 화신께서는 오직 한 번만 보이시고 말씀하시며, 나는 오직 그 한 번의 기회를 허락받아 이것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신을 마주한 이기적이고 쓰레기 같은 지체에게 유일무이한 자비를 내려주신 신의 기록을 마음껏 찬미하도록 하라. 아, 우리의 화신! 탐욕의 화신에게 영원한 찬사를! 통증이 밀려듦에 따라 온몸이 굽어든다. 추한 인간은 눈앞의 위대...
5달 전 깊은 파랑 속에서 파이스는 두꺼운 커튼을 친다. 따뜻한 주황으로 물들었던 공간은 검푸른 어둠에 찬찬히 잠식되어간다. 한 차례 가다듬은 숨에선 떨림이 느껴졌다. 늘 가지던, 학습된 두려움이었다. 곧 가볍고 부드러운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포션을 섞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 몸을 기댄다. 초커에 달린 연푸른색 구슬이 반짝거린다. 마법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을 느낀다. 위험한 일을 하...
9달 전 Adele 여행, 이 세상에서 그것만큼 심장이 뛰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항상 무거운 짐을 가지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사람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노래와 여행을 사랑하는 것이 마치 현대의 음유시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름. 아델(Adele), 류성아 영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델은 어머니가, 성아는 아버지가...
8달 전 혼자 남은 세상에서 가넷은 모든 것을 완벽히 망각하기 전에 노트를 펼쳐 머지않아 잊어버릴 것들을 기록해 놓았다. 제 작은 제자가 선물해 준 목걸이와 팔찌, 제자를 배웅해 준 것, 자신이 내뱉은 이별의 말들, 그때 느꼈던 기분. 이 선물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물증이다. 완벽한 기록으로 남겨놓고 나서 책장 한편에 책을 꽂았다. 언젠가 이 책을 꺼내 읽을 순간을 기다리며. 문...
8달 전 죽음과 고통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진실이다. 그 어떤 생명도 끝을 상정하고 살지 않는다, 그리고 막연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여기 있노라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바로 죽음이고, 또한 끝을 수도 없이 그린 자를 비웃는 것처럼 뒤편에 녹아드는 것도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오만한...
7달 전 별의 아이 세상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말 그대로의 사실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세상에 펴지는 역병과 역마, 불신과 불이해, 더 이상 신이나 천사, 악마도 아니게 된 끔찍한 괴물들이 세상을 시시각각 집어삼키려 했다. 다만 더 이상 신을 따르지 않게 된 타천사와 악마는 세상을 집어삼키려는 역병에 대항했고, 일부 사람들은 타...
일 년 전 원점으로 돌아온 것 눈을 떴다. 빨갛게 충혈된 눈이 욱신거렸다. 죽음의 감각이 목에 걸려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흉터 하나 없는 손으로 목을 매만지다가 곧 몸을 웅크린다. 살결에 스치는 천의 감각이 부드럽고 포근하다가 소름끼치는 감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마치 진절머리치듯 몸을 벌떡 일으킨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이라서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지금 슈리 라비츠의 ...
일 년 전 기사 서약 우거진 수풀과 나무뿐인 숲에서 나침반도 없이 기나긴 푸른 흔적을 따라 걷는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푸른 빛깔에 현혹되었다고 생각할 터였으나, 이 나침반도 없는 숲에서 푸른 흔적은 길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답답하던 공기는 걷히고 곧 깨끗한 바람이 폐부에 가득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혼이 빠진 듯한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본다.... 5
일 년 전 다섯 번째 생의 마지막. 눈을 뜬다. 죽은 꽃잎색의 눈이 탁했다. 이곳에서 시간이 얼마 지났는지도 가늠되지 않는다. 몸에 깃든 신성력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없이 갇혀있는 게 심각하게 버거웠다. 이토록 괴로운 것을 보니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이 훌쩍 지난 것 같았다. 신성력이 어떻게든 힘이 되어 몸에 깃들었으나 그것도 한계였다. 슈리는 천천...
일 년 전 비 내리는 골목 아, 역겨워. 숨을 내뱉다가 울컥, 피를 토해낸다. 일진이 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끝내고 나왔을 테지만,하필 그때 걸려서…. 이제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아이는 익숙하게 상처를 수습하고, 피를 닦는다. 뒷세계의 아이들의 사정이야 뻔하다. 버리고, 다치게 하고, 수단으로 쓴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에 그것을 깨달은 아이는 자기 ...
일 년 전 영혼을 걸고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하면, 간단히 말하자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뒤틀렸나? 신체의 절반 쯤 조각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몸을 이어붙이는 치유마법 쯤은 간단히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절대 치료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건 고문이었으니까. 살거죽을 들어내고 밑에 있는 것을 찌른다. 뼈가 부러진다. 죽을 것 같으면 숨...
일 년 전 기도 프시케는 길게 숨을 내쉰다. 왼쪽 뺨을 덮은 장미 문양이 불길한 빛깔을 내며 반짝였다. 피부 깊이 새겨진 낙인은 사라질 새도 없었다. 매순간 호흡을 이어가는 게 지나치게 버거웠고, 작열통이 몸을 타고 기어올라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프시케는 스스로를 은폐했고,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런 프시케의 뜻을 존중했다. 신의 눈길을 받는다는 것은...
일 년 전 침묵 속 안온 방의 내부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시간이 밤인 것도 있었고, 밤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두꺼운 커튼이 걷히지 않는 상태였기에 빛 한점 들지 않았다. 원래는 테인은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키르케. 안타까운 사람. 마녀라는 오명을 얻어 죽을뻔한 사람을 구해왔다. 단순한 동정심 때문이라면, 제 방에 이 사람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약간의 동정심...
일 년 전 낯선 화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 인용 불행, 이 세상에 그것만큼 극적인 연극은 없다. 창조됨에 기뻐하던 정신체는 이윽고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것’, ‘아무것도 아닌 소모품’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이것만큼 거대한 비극이 또 어디에 있으며 또한 이것만큼 아름다운 연극이 어디에 있을까? 창조됨을 떠올렸다. 그저 단순한 떠다니는 것에 불과했던...
일 년 전 꽃을 든 사람 달리아는 길을 걷는다. 맑은 햇살에는 그림자 한 점 없었고, 환한 길가에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달리아는 그런 풍경 속에 있는 게 좋았다. 지독하게도 평온하니까. 느긋한 걸음으로 한참이나 길을 걷다가, 익숙한 얼굴이라도 보면 말을 건네고 몇 마디 나누고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꽃샘추위가 있었는데, 그건 어느새 다 물러나...
일 년 전 빛 없는 밤 로벨리아는 그 어떠한 마음도 담아내지 못하는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하늘에는 별을 닮은 것들이 반짝였다. 저건 별이 아니다. 이 세상이 매연으로 가득차고 오염물질이 부유하며 하늘은 검게 변했다. 이제 보이는 것은 인공위성 뿐이다. 언젠가 들은 말이 떠오른다. 모든 것은 별의 잔해로 만들어졌다고. 그러니, 인공위성은 필시 땅 위에서 탄생한 별이라...
일 년 전 구원자의 쓸모 격정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바뀌고, 모든 이들이 변한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졌고, 많은 것들이 바뀌어간다. 사람들은 신이 떠난 세상에서 신앙을 원했다. 죽은 신의 사체에서 살아가는 인류라, 이 얼마나 무지하고 쓸모없는가? 신이 죽었음을 모르는 이가 있기는 한가? 하지만 그러한 작은 안온조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아니, 없다. 사람들은 모두...
일 년 전 달콤한 낮잠 창가의 바로 앞에는 두 명이 누워도 여유로운 공간이 있다. 햇살을 맞으면서 쉬는 것을 좋아하던 탓에 만들어둔 공간이었다. 크로커스는 여유로운 주말이면 아윤과 함께 산책을 나가거나 놀러 다니기도 했지만, 종종 집안에서 온종일 책을 읽기도 했다. 한껏 좋은 날씨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최근에는 재미있는 소설 하나를 새로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
일 년 전 덧없는 것. 아카는 상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아카보다 잘 아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진다. 쌓아온 것은 결국 무너진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이 영원하다. 티끌 같은 희망을 아무리 손에 그러쥔다 해도 사라질 뿐이다. 그러니 찰나의 안온에 매달리지 말고, 증오로 살아가지 말고, 어리석음에 눈멀지 말고, 그럼에도 내던지지 말고, …. 상실을 끝없...
일 년 전 슬픈 밤 스피넬은 숨을 내쉰다. 축축하고 무거운 호흡이 얕게 이어진다. 주변을 느릿하게 둘러봤다. 어두운 건물 안에 혼자 남겨져있었다. 숨을 끌어내듯 내쉰 다음, 고개를 치켜든다. 얼굴에 뜨거운 열감이 감돌고, 목에선 울음이 되지 못한 아우성이 맴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천천히 되짚어보자면, 정말 이상했다. 하루의 시...
일 년 전 아름다운 하늘 아래 비가 내린다. 멈추지 않고 계속, 쉴 새 없이. 언제나 비가 쏟아지는 세상은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수많은 생명, 수많은 희망, 수많은 빛. 하지만 언제나 쏟아지는 비 때문에 하늘은 그저 색 없는 잿빛이라서 수많은 어둠까지도 잃어버렸다. 세상이 무너질 듯 쏟아져내린 비는 언젠가부터 재앙에서 일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간간이 들어오는 햇살에 기뻐하고...
일 년 전 무제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긴 머리카락이 피로 엉겨 붙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던전의 내부에서 시간 감각까지 흐릿해지고, 손에 잡히는 스태프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곧 스태프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눈의 빛깔을 그대로 담은 듯한 마나가 형형한 기세로 모여들다가 곧 멀리까지 쏘아 나간다. 새빨간 불덩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
10달 전 한밤의 화살 스카틀람은 영광의 시대 한가운데서 살아간다. 지지 않는 태양을 떠받들고 저마다 해사한 웃음을 흘리는 자들을 바라본다. 가장 행복하며 무지한 자들. 가장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이들. 그들이 있었기에 영광이 있고, 영광이 있었기에 그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그 모든 것은 스카틀람과 관계가 없었다. 신의 힘을 이어받은 것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으나 힘에는 책...
일 년 전 영광의 시대 인간이 신의 힘을 이어받고, 그 힘을 쓰며, 감히 신의 이름으로 눈부신 일을 행한다. 마법은 더 이상 전설이나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며 모든 이들이 강렬한 의지로 신들의 앞에서 선서하면 그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날개를 가지고, 누군가는 물속에서 숨을 쉰다. 눈 부신 빛으로 악을 차단하고 절망보다 깊은 어둠으로 안식을 되찾는다. 먼 훗날 인류...
10달 전 진정한 영광 페일레아칸은 아주 오랜만에 인간들이 사는 땅을 찾았다. 요정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냥꾼의 죽음을 알아채고, 죽어가는 이의 곁에서 추모하는 것이다. 사냥꾼이라 함은 신의 힘을 이어받은 자들이며, 영광을 위해 세상에 자신을 헌납한 자들이다. 요정들은 신의 사자로써 영광을 위해 헌납한 자들을 존중할 의무가 있었고, 그들은 영광을 위해 스스로를 태...
10달 전 도시의 시스템 소녀가 처음 눈뜬 곳은 깊은 수조였다. 수많은 금속판 사이에서 호흡기를 단 채였다. 소녀는 의식을 가진 순간부터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비밀리에 실행됐던 프로젝트였다. 인공 생명체와 데이터의 결합. 그리고 그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생체 컴퓨터는 거대한 도시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변질...
한 달 전 이름 없는 떠돌이 거처 없이 떠도는 이형의 검사. 얼굴 없이 목소리만 있는 자는 검을 잡을 때 정중하고 깍듯한 기사도를 보이며, 평소에도 그것에 걸맞는 언행을 이어간다. 외형 때문에 많은 두려움을 사곤 하지만, 평소의 행동을 본 이들은 그를 다정한 존재라고 평가한다. “특별한 이름은 없습니다. 무명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무명. 이름이 원래부터 없었는지, 있는데 잊어버린...
한 달 전 의미 없는 가정일지라도 모든 걸 돌이킬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파이스는 그런 것을 막연히 생각해 본다. 만약, 아주 만약에, 다른 가족의 악행을 막을 수 있었다면. 버려지지 않게 되었다면. 사랑하는 친구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면. 이 일들을 하지 않길 선택할 수 있었다면. 이용당하지 않았다면…. 파이스는 목에 남은 긴 상처를 짚어본다. 욕조에 푼 약품이 상처에 스며든다. 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