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긴 암흑의 끝 타인과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게 지독한 저주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언제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만큼 오래된 일이었던 탓이다. 반화는 이제 8살도 안 된 아이였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건 본질적으로 차별이 된다는 걸 알았다. 이 세상에서 다른 건 죄다. 다른 힘을 가지고 있던지,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던지,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되었든,...
일 년 전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는 것.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지구는 천천히 나아지고 있었다. 떠난 사람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로 이 땅을 치유해나간다. 오염된 것, 부서진 것들이 천천히 나아진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이름 없는 기술자는 파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지식인의 죽음은 거대한 슬픔이 될 수...
일 년 전 미확인구역의 직원 벌레 한 마리 없는, 끝도 없이 펼쳐진 플라스틱 풀밭이 일렁거린다. 높은 천장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는 구름이 흘러가고, 창문 바깥에는 물이 일렁거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지만 풀밭은 한껏 나부끼고 있다. 그 기괴한 풍경을 조용히 눈에 담던 자는 잠시 장갑을 빼고 손을 앞으로 뻗어본다. 이 건조해보이기만 한 곳은 축축하고 눅눅한 공기가 가득했다. 마치 장마...
일 년 전 백룸에서의 사고 뒤집힌 시야가 묵직한 충격과 함께 돌아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닥에 떨어진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다. 나테타는 짧은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킨다. 분명 친구와 함께 세계 선수권 대회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야가 뒤집히고 불쾌한 부유감이 들면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노란 벽지가 붙...
일 년 전 미지의 공간 안내서 안녕하세요, 방랑자.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깨끗한 노트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두고 다니고 있거든요.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이 노트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거든요. 당신을 방랑자라고 칭하는 이유는 당신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도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던 게 아닌가요? 저는 그랬거든...
일 년 전 구룡성채의 주인 건물이 블럭처럼 겹겹이 쌓아 올려진 곳에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온갖 화학약품으로 건물을 쓸고 닦던 탓에 아무리 더러워도 벌레 한 마리 생기지 않았고, 풀이끼 하나 자라지 않았다. 콘크리트도 뚫고 자라는 꽃도 이 삭막한 도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풀의 어두운 녹색은 없고 녹색으로 물든 조명만이 깜빡거린다. 숨쉬기조차 갑갑했던 이곳에서는 햇빛 부족을 ...
일 년 전 그림자를 아는 것 고작 8살이 된 아이는 어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밤이 오면 하늘이 검어지는 것이나 그림자가 깊어는 것, 빛이 닿지 않는 곳이 뿌옇게 물드는 것이나…. 그런 표면적인 것 말고도 내밀한 깊은 사정까지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숨을 삼키고 침묵하는 법도, 차고 넘치는 마음을 삼키는 법도 알았다. 하지만 삼킨 마음에 체하기라도 ...
일 년 전 창백한 숲 “나는 그저 믿고 싶었어요.” 창백한 숲에 오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올까. 어느 비루한 현실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는 걸까. 비루한 곳에서 더욱 비루한 곳으로, 최악에서 더한 최악으로, 지옥에서 더한 지옥으로, 이곳이 바닥인 줄 알았건만 밑에는 더한 것이 있더라. 지옥에는 끝이 없더라. 미스티는 이 지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절망도, 울음도 쓸모없어진 세...
일 년 전 영원불멸한... 새로운 시작 속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랑스러운 이들에게 영원불멸한 증오를 바친다. 미스티는 창백한 숲 한가운데 서서 느릿하게 숨을 내쉰다. 차갑게 매마른 것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감겼다 뜨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가 본래의 빛깔을 찾는다는 착각을 한다. 점멸하는 것만 같은 시야와 함께 생각과 감정도 사라졌다가도 금세 돌아온다. 눈을 ...
일 년 전 영원한 것은 없다 아리아는 찻잔을 준비했다. 적당한 햇살 한 점이 비쳐 들어오는 집안은 고요했다. 어쩌면 삭막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아리아는 홀로 있으면서도 찻잔을 여러 개 준비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움과 슬픔을 기반으로 둔 행동이었다. 언젠가 그가 사랑하던 이들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당신들이 찾아왔으면. 당신들이 살아있었으면. 당신들...
10달 전 기나긴 그리움 이름 없는 기사는 평생을 떠돈다. 평생이 더 이상 평생이 아니게 될 때까지 세상을 걷는다. 몸에 단단히 두른 갑주가 빛을 잃은 일은 없었고, 손에 든 맑은 숲의 빛깔을 담은 검은 언제나 부정한 것을 갈랐다. 악에 대항할 힘을. 그리고 선한 것을 지킬 힘을. 의지를. 수없이 반복한 말은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기도였다. 불사의 저주를 가진 채 오랜 세월을 살아...
10달 전 어버이날 편지 반화가 어느 정도 큰 이후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일반인은 이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다. 이능력, 특히 반화가 가진 힘은 무언가를 상처입히기에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상처 입는 것이 두려운 자에게 상처입히기에 좋은 능력이 있다니. 반화는 이것이 꼭 아주 나쁜 농담 같다고 느꼈다. 그럴 때면 보호자인 한주가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알아채는지 곁에 ...
일 년 전 향기로 기억되는 법 월하미인은 언제나 제 힘으로 걷는 사람이었다. 설령 온몸이 망가지더라도,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걸음을 앞으로 향했다. 그건 월하미인이라는 사람의, 그 영혼의 빛깔이나 향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의 영혼이 가지게 되는 방향성 말이다. 월하미인은 언제나 걷고 싶어 했다. 튼튼한 몸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서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
일 년 전 축제같은 삶 아- 아- 음, 큼, 저희의 목소리가 잘 들리세요? 아, 어, 어라…. 응? 당황하신 것 알아요, 이해해요. 혼란스럽겠죠. 놀라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어요. 진심으로요! 어, 음…. 저기, 여기가 어딘가요? 아, 여긴 꿈속 세상이에요! 당신의 무의식에 찾아왔어요. 아주 먼 시간으로부터요! 월하미인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몸은 붕 뜬 느낌이...
일 년 전 흰꽃겨울 눈이 한가득 쌓인 길을 걷는다. 월하미인은 조심스러운 걸음을 내디딘다. 흰 입김이 공중에 꽃송이처럼 피어오르다 사라진다. 상기된 뺨이 꼭 아플 것처럼 붉어지면, 함께 걷던 이가 월하미인의 곁에서 풀어질 것처럼 흔들리는 목도리를 꼭 감싸준다. 언제나 쓰던 흰 베일을 벗은 자의 창백한 얼굴에는 보기 드문 분홍빛이 머무른다. 그 모습이 연약하고 부드러우며 아름다...
10달 전 영원함에 관해 리운 님, 영원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영원함은 없다고들 하잖아요. 글을 짓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해서요. 월하미인은 스쳐 지나가듯 들은 질문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첫 책을 냈을 때, 아직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서 못 벗어났던 19살에 받았던 질문이었다. 그립고 서글픈 것이 많아 그리운을 필명으로 삼았던 월하미인은 그 질...
9달 전 파티 초대장을 반납하러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언젠가 채널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부메랑처럼 날아와 발치에 떨어진다. 이 삶을 견뎌내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단 한 번도 손에 제대로 된 결과가 들린 적이 없었다. 애초에 해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채널은 어느 정도 큰 다음부터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해답이 없는 질문...
13일 전 가을 속에서 햇살이 차갑다. 성큼 다가온 가을의 냉기가 세상에 스며든다. 채널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벤치에 앉아 졸고 있는 월하미인을 본다. 이런 날씨에도 잘도 바깥에서 피곤해하는 것을 보고, 전선으로 월하미인의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여기서 자지 말고 들어가서 쉬라고 말했지만, 월하미인은 좀처럼 수마를 떨쳐내지 못했다. 몸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