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불행에서 유일한... 설화는 어렸을 때만 해도, 제 삶에 빌어먹을 불행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공허함 정도일까? 이런 가치도 없고 기만적인 일로 가득찬 생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똑똑했고, 그런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인형같은 삶이 얼마나 가치없는 것...
일 년 전 광증의 밤 설화는 슬픔을 알고 있었다. 고통도 알고 있었다. 심장이 물에 잠기는 감각을 알았고, 너무 아파서 차마 비명조차 못 지르는 감각을 알았다. 설화는, 이 슬픔을 이겨낼 생각이 없었다. 이 슬픔에 잠겨 죽자. 죽어가는 형제들처럼. 서로를 해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자들을 보라. 저 치들을 보라. 형제들을 죽이는 형제들을 보라…. 설화는 이 슬픔 속에서 ... 32
일 년 전 고요의 밤 금비천은 오랜만에 만난 친우와 조용한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은설화는 가끔 금비천을 찾아왔고, 금비천도 가끔 은설화를 찾아갔다. 처음은 무언가를 물어보기 위해서였고, 그다음으로는 무언가에 관해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원치 않았던 질문과 대답, 의도하지 않았던 위협, 그리고 상처들…. 같으면서도 다른 상처들이 애매하게 맞물려, 얕으면서도 깊은- 기묘한 유대관계...
일 년 전 호수의 종 I는 긴 숨을 내쉰다. 한숨을 따라 매캐한 연기가 흩어지고, 온갖 검은 나방과 부스럼 같은 조각들이 나뒹군다. I는 호수의 충실한 종이며, 미스터 아울과 미스터 크로우의 동료이자, 그들의 열쇠가 될 자이다. 미스터 크로우는 미스 I를 보고 기묘한 충동을 느낀다. 그녀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여성으로서의 매력보다는 학자로서의 매력이 더욱 강렬한 존재였다. 그...
일 년 전 호수 밑바닥 미스 I는 기억들을 엮는다. 호수의 부름에 따라- 혹은 앞길을 닦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기억을 큐브로 복제해 호수에 바치고, 스스로 엘릭서의 힘을 얻고 유한의 생명으로 무한의 시간을 얻은 자는 열쇠가 되었다. 열쇠를 건네고 빼앗는 자, 스스로 열쇠가 된 자는 과거의 부스럼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저명한 학자였던 자는 진리를 쫓는 자이자 그들의 열쇠가 된다...
9달 전 불탄 땅에서 매캐한 화약 가루가 날렸다. 적막한 어둠이 섬광탄에 의해 날아가듯 사라지고, 총격전이 벌어진다. 이들은 이 전쟁이 왜 일어난지도 모른 채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폭음이 길게, 또다시 길게 늘어진다. 검은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이 찢어발겨지는 소음 속에서 난잡하게 흐트러진다. 그들은 이 전쟁이 왜 시작됐는지 몰랐지만, ...
8달 전 낙하 비행 떨어지는 것과 날아오르는 것은 같은 말일까?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말이야. 그것을 나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두 말이 같다고 생각할래. 그편이 더 행복하잖아. 언제나 날고 싶었다. 날개를 가진 새처럼. 높이 솟은 민둥산, 녹색 식물에게 잡아먹힌 비틀린 건물들, 저 멀리 반짝이는 안개와도 같은 햇살. 하늘은 땅이 ...
일 년 전 향수병 향수가 바닥에 떨어졌다. 설마 깨지기야 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이었으나 바닥에 닿자마자 보란듯이 쩍, 하고 갈라지며 깨졌다. 꼭 얼음을 정으로 깬 것처럼. 독한 꽃향기가 사방에 깔렸고, 코를 찌르는 향기에 머리가 아팠다. 굳게 닫고 있던 창문을 열까, 그런 고민을 했으나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결코 없었다. 바깥은 더러웠다. 결벽증에 가까운 오염 혐오가 생긴지 ...
8달 전 마음정리 사랑하는 너, 너야. 난 네가 없는 곳에서 너를 부른다. 사랑하고, 보고 싶고, 또 원망도 하는 너를 불러 본다. 너는 그렇게 다 남기고 떠나서 정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왜 이렇게 어지르기만 해 놓고 가는 건지 알 수도 없다. 들이켜는 숨에서는 물기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상실의 메마름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온통 쉬고 싶다. 이...
일 년 전 여름의 청춘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허공에 퍼진다. 후덥지근한 길거리에 싸구려 화장품 냄새와 낡은 전단지가 다닥다닥 눌어붙는다. 여름의 열기와 향수, 뜨뜻한 바람이 뒤섞여 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강에 불쾌한 여름의 향기가 스친다. 여름의 길목에는 싸구려 낭만과 소주의 향기가 가득하다. 소주도 싸구려인가? 알 수 없었다. 쌉싸름하고 찬 소주가 손을 축축하게 적...
일 년 전 느린 꽃 꽃이 피지 않은 초목이 이제야 소란스럽다. 주변은 이미 다 여름인데 혼자서만 봄을 맞이한 것처럼 분주하다. 봄에 피었어야 마땅한 것이 여름이 되어서야 꽃을 피울 준비를 하니, 한때를 다 놓친 것은 여름과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나무들은 전부 초록 잎사귀를 옷처럼 입고 있었다. 늦은 것이 서글퍼 열심히 꽃을 피울 준비를 한다. 무성한 초록이 없는 것이 꽃가지...
일 년 전 종말과 혜성 어느 햇살 좋은 날, 모든 아이들은 지구에 종말이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구도, 종말도 뭔지 몰랐던 아이들은 그 사실만을 절실히 깨닫는다. 모든 것이 한 줌의 잿더미도 되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파란 하늘도, 단단한 땅도, 예쁜 강과 바다도, 숲과 사막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전부 저 까만 하늘에 흩뿌려지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언어로...
일 년 전 波瀾 自由 자유를 포기함이란 허용과 같다. 허용은 통제다. 두 개는 늘 연결되어 있고,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줄이었다. 말 그대로 줄다리기다. 그러니 약간만 체념하고 포기하면 허용선은 무한까지 확장되었고, 그것은 곧 자유가 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결국 다 부서진 것 그러안고 웃어버리면 그것이 바로 자유의 허용이었다. 본디 자유란 변화하지 않는 가치이다. 언...
일 년 전 웃음이 머물던 땅 기사가 죽었고, 영웅이 죽었으며, 수많은 소수일족이 죽은 땅에 볕이 들었다. 이 세상은 서서히 죽은 자의 존재를 잊어간다. 바람이 불었고, 황금 들판이 일렁거리고, 깨끗한 물살이 하릴없이 흘러간다. 한때는 시취로 가득찼던 곳은 그저 상쾌한 바람만을 남겼다. 용의 뼈가 서서히 삭아가는 땅에선 여전히 바람이 불었고 물이 흐른다.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며, 폭풍...
일 년 전 빛과 별 투명한 천장 너머에 별이 반짝였다. 온갖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하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그 아스라지는 풍경을 보고 해사한 웃음을 머금는다. 페리윙클은 맑은 빛깔의 조명 아래에서 캔버스 위에 천천히 그림을 그린다. 반짝이는 것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그런 것들보다 더욱 반짝이는 마음들을 생각하며. 페리윙클은 더없이 밝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일 년 전 무제 1 밝은 빛에 손을 갖다 대면, 손끝이 붉게 빛나. 그게 좋아서 자꾸만 빛을 보게 돼. 희미한 빛에서도 내 몸은 착실히 빛을 받아 빛나고 있어.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속이 울렁거려도. 토할 것만 같아도. 머릿속은 슬픔으로 가득한데 심장은 슬픔도 모른 채 세차게 뛰고 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아? 내 심장도 슬픔을 알 텐데. 죽음을 알 텐데. 내 머리에서 흘러나...
일 년 전 무제 2 한 인간이 긴 잠에서 깨어난 뒤, 허공을 향해 질문을 던졌어. 이건 꿈인가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다른 인간이 대답했지. 이건 현실이야. 꿈보다 더 꿈같은 공간이 현실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인간은 손으로 눈을 비볐어. 이건 꿈인가요? 다시 던진 질문에, 다른 인간이 대답했어. 이건 현실이야. 다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어. 이건 현실이구나. 여전히 이해할 수...
일 년 전 달밤의 화음 창밖에는 밝은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수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시간이다. 아사나기 쇼지, 한때 많은 사람을 돕고 이름을 날리던 사람은 창가에 기대앉아 바깥을 바라본다. 이제는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없음에 짧은 슬픔을 가지면서, 그럼에도 이 슬픔을 가진 채로 살아있는 것은 행운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하고 마는 것이다. 열병이 들끓는 몸은 차게 식을 ...
일 년 전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250518 매짧글_제45주년 518 민주화운동 앞서 걷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걷는다. 이 하나의 힘을 다해, 그렇게 걷는다. 두려움을 입안 가득 쑤셔넣고 걷는다. 사실 우리가 걷는 것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걷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나와 네가 포함되는 우리를 위해서다. 우리를 위해서. 이 ...
일 년 전 세상의 끝이 와도 꿈 기반 글 세상은 변화의 물살을 맞았다. 그 변화는 재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세상에는 익사하지 않는 투명하고 빛나는 물로 뒤덮였고,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죽음이 만연했다. 수많은 과학자와 저명한 학자들이 이 투명하게 빛나는 물에 대해 조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동물과 식물을 죽이고, 사람을 아프게 하고, 쇠를 녹슬게 하고 콘크리트를 분해하고 유리를 녹...
일 년 전 명왕성은 슬프지 않아 명왕성은 슬프지 않았다. 명왕성은 그 자신이 그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포함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바라봐준다는 기쁨, 슬픔과 외로움을 압도할 만큼의 웃음, 또한 선명한 안도감이 있었다. 그래서 명왕성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 이름 붙여지고 그들과 ‘함께’를 논하던 것이 더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러니 명왕성은, 그들이 이름붙여준 공...
7달 전 평범하고 진부한 편지 안녕, 잘 지냈어? 나 있지, 아주 이상한 축제에 와 있는 기분으로 펜을 들어. 오늘은 햇살이 좋더라! 따뜻한 빛에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이 길게, 더 길게 불어와. 나의 긴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흩어져서 뺨이고 목덜미고 전부 간지럽혀. 나는 좋은 햇살과 좋은 바람 아래에 서서 흰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 너와 함께 보면 좋았겠다,...
3달 전 평범하고 진부한 답장 안녕, Yu. 네가 보낸 편지를 받았어. 편지가 건너오면서 글자는 씻겨 나갔지만, 네가 보낸 것들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향수와 꽃잎들이 들어 있더라. 이곳에 속세의 향기가 전혀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 향기 너무 좋다. 전에 너에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면, 응, 엄청 감동적이야. 고마워. 이제 ... 1
3달 전 친애하는 절망감 아무렇게나 깨진 유리 조각과 날카로운 모래를 찢어진 폐 안에 밀어 넣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차갑게 식은 몸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낡은 천을 칭칭 감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거리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약초 말이를 입에 물고 끝부분에 불을 붙인다. 진통제 연기가 폐부를 물들이며 손의 떨림을 약하게 만들었다. 검은 연기가 수놓이는 하늘은 빌어먹도록 파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