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내 이름을 불러줘 : 무명(無名)의 계절 - 06 경원은 애초에 초조함이나 불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다. 여유로움을 품고 다니던 그는 하루라도 미소를 잃었던 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혹시 영업하시나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어서요.” 난감해하는 목소리는 어쩐지 태연했다. 급하게 손님이 있는 척 2층으로 올라왔지만, 오늘은 사실 예약 같은 것이 있지 않았다. 경원은 ...
한 달 전 내 이름을 불러줘 : 무명(無名)의 계절 - 05 ─마약을 투약하고 역주행하다 차량 3대를 들이받은 운전자 A씨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사고로 상대 차량 탑승자 2명이 숨졌으며, 4명이 경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이어서 다음 소식입니다. 할머니가 있고, 아저씨가 있고, 단항과 비슷한 또래 아이도 있는 일반 병실이었다. 단항은 배정된 식판을 내려다보며 국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한 달 전 내 이름을 불러줘 : 무명(無名)의 계절 - 04 전날 밤, 이런저런 후기와 함께 평점을 살펴보던 단항이 USB에 영화 하나를 내려받았다. 제목은 「J씨와 D군의 끝나지 않는 연애사정」으로 감정을 배운 안드로이드가 나오는 SF 로맨스였다. 단항은 소개란에 있던 문구를 떠올리며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궁금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단항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과연 자신조차 모르는 감정을 영...
한 달 전 내 이름을 불러줘 : 무명(無名)의 계절 - 03 하늘이 무척 맑은 날이었다. 가디건 하나를 걸쳐 입은 단항은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닫혀있던 카페 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만난 Mar. 7th에게 소설책 하나를 전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소음이 없는 평일의 오후는 조용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오늘따라 유달리 더 그랬다. 어렴풋이 들리는 새소리와 높게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소리 등, 소모품을 ...
한 달 전 내 이름을 불러줘 : 무명(無名)의 계절 - 02 두툼해 보이는 가방에 노트북과 필기도구를 챙긴 단항이 집을 나섰다. 영사가 내주었던 숙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단항은 거리를 걷는 내내 [슬픔]의 정의를 떠올렸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원통한 일을 겪거나 불쌍한 일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슴이 그냥 아프다는 것일까? 단항은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 달 전 내 이름을 불러줘 : 무명(無名)의 계절 - 01 소견서를 받은 게 처음은 아니었다. “향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여기구나.” 앱을 따라 걷고 있던 단항이 고개를 들었다. 언뜻 봐도 거대한 건물이었다. 붙어있는 간판만 해도 10개가 훌쩍 넘어 보였을까. 눈으로 셈을 하고 있던 단항이 4층 정도에 있는 간판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예약하셨나요?” “네. 전화로 예약했었어요. 이름은 단항...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8 그렇게 우린 갈라서게 되고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달갑지 않다. 잠이 들어버려도 금방 또 깨어나고야 만다. 어째서 나는 이곳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누구인가. 단항은 마른 눈을 깜박거리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숨을 쉬는 게 이렇게 덧없을 줄은 몰랐다. 노인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차라리 그들처럼 검이라도 겨누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자꾸만 나타나는 노인...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7 그렇게 우린 갈라서게 되고 장군님. 그를 부르던 말 한마디가 떠나가질 않는다. 단항은 경원이 준 옥조를 만지작거리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만에 하나 그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우리는 과거에서부터 이미 이런 운명이었던 것일까?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저 손에 쥐어진 옥조가 단단하기만 하다.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사이만큼이나 가볍고, 던지면 툭 깨져버릴지도 모르는 조그마한 크기…...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6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되었네 딸랑! 평소와 다름없이 여느 맑은 날이었다. 계산대 앞에 앉아있던 단항은 옅은 방울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인사를 하였다. “어서 오세요.” 한참 집중하고 있던 단항이 페이지를 넘기며 눈을 굴렸다. 해야 할 일만 정확하게 해내면, 누구도 그런 단항을 나무라지 않았다. 애초에 허름하기에 이를 데 없는 책방이었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는...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5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되었네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한 시간이었다. 세차게 내리던 비가 열기를 잃고, 젖어 있던 공기가 눅눅히 식어가고 있을 때였다. “단항.” 경원은 눈을 뜬 채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뒤엉킨 옷가지와 발에 치여 쓰러져 버린 책더미 등. 어쩐지 처음 왔을 때보다 더욱 어질러져 있는 것 같았지만, 단항은 얘기해보라는 듯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당겼다. 나란히...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4 순간의 인연은 구원이 되어 경원은 근래에 부쩍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단항이 보이질 않았다. 그가 곧잘 찾던 강물을 보며 하염없이 기다려보았지만, 그를 반기는 것은 고요한 적막이 전부였다. “비디아다라가 나타났다는데, 소식 들었어?”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한동안 엄청 시끄러웠잖아.” “으… 무서워. 이러다가 또 전쟁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경원을 스치는 수많...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3 순간의 인연은 구원이 되어 “요즘 들어 웬일이라냐. 나갔다가 오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놈이.”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단항의 행동을 살폈다. 겉으로 보기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적기만 한 말수와 담담한 표정까지. 분명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지만, 곧잘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힘이 있었다. “그냥……. 날이 꽤 좋아서요. 잠깐 좀 ...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2 우연한 만남은 인연이 되고 그날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걸어두었던 우산이 툭 떨어지고 나서였다. 계산대에 앉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던 단항은 눈을 깜박거리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방울방울 맺혀있는 물기는 어디에도 없었건만, 귓가에서는 꼭 빗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다. ‘자네, 아까부터 계속 몸이 떨려오고 있어.’ 단항이 손에 든 책을 놓고...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1 우연한 만남은 인연이 되고 성력 2368년. 단항은 숲의 나무가 우거지기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꿈을 꾸었다. 여전히 과거에 있다는 증거였다. 전쟁이 시작되고 종식되었던 날이 딱 이때쯤이었을까. 단항은 젖어 있는 얼굴을 닦아내며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도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오는 듯, 전에 없던 환청이 울려 퍼졌다. “하아, 오늘로 벌써 10년째인가.” 낮은 천장과 습기를 머금은 냄새가 ...
6달 전 태양은 빗줄기에 바스라지고 00 너를 기억하기 위한 이야기 「누군가가 물었다. “성력 2358년.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해?” 그러면 나는 늘 잔상 속에 있던 상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물론이지. 지금도 난,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 라고.」 어둠 속을 비추는 눈동자와 사정없이 찢기는 사람의 가죽이 선명하다. 단항은 그날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단 한 번도 잊었던 적이 없었다. 자신을 대신해 쓰러져 간 수많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