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전 1928년, 봄 (3) “런던으로 가신다고요? 지금?” “그래요, 런던.” “우박이 그쳤다고는 하지만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요? 내일 아침 일찍, 아니, 날이 갤 때까지 몇 시간만이라도 기다렸다가 출발하시는 건….” “아니. 지금 갑니다.” 잔걱정이 많은 브릭스 부인뿐만이 아니라 집사 켄트릭 씨까지도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레슬리는 그들의 염려와 설득을 짧고 단호한 대답으로 전부...
8일 전 1928년, 봄 (2) ⌜오크데일 백작, 레슬리 데클린 귀하.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귀하의 누이동생인 레이디 세실리아 데클린-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세실리아 데클린-혼의 유해는 세인트 로렌스 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생전 고인의 희망에 따라 국교 방식으로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며, 시신은 타워 햄리츠... 2
18일 전 2장 (1) 그렇게 마침내…. 긴 동면을 마치고 깨어난 불개의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상은…. 글쎄,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불개가 잠에 들기 직전 상상했던 것처럼, 쇠붙이로 만든 껍데기에 인간의 마음을 심은 새 종족이 활보하는 곳? 아니면 지구의 지형이 바뀌어 바다로 변해버린 곳? 그도 아니면 커다란 별똥별이 날아와 지구의 식생 전체가 변화하고 있는 와중인데 ...
18일 전 아직 세상이 끝나기 전 (2) 내가 정말 훤연을 엄마라고 생각했느냐고? 예끼, 이놈들! 감히 이 위대한 몸을 바보 취급하는 게냐? 그때 내가 아무리 태어난지 얼마 안 된 털뭉치 나부랭이었어도, 어미형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나도 훤연이 날 낳아준 어미가 아닌 것쯤은 알았다, 이 말이다. 애초에 훤연은 인간 수컷이니까. 인간 수컷도 우리 수컷과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지 못한...
19일 전 1928년, 봄 (1) 오전 9시 경에는 햇빛이 제법 따사로워 빨래하기 좋은 날이구나 싶었는데, 저택 홀의 궤종시계 시침이 11시를 지나기 무섭게 태양이 구름 뒤로 숨고 바람은 차가워지더니 점심식사를 끝마칠 무렵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탁방 고참 하녀의 지휘로 젊은 하녀들이 빨래줄에서 옷과 이불 시트를 구출하러 뛰어다니면서 ‘꺄악, 꺅’ 지르는 비명이 데클린 하우스를 ...
4달 전 1913년, 여름 (6) (초고) “갑자기?” “아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가 예의없이 굴었지. 아무리 앤소니 친구라도 너는 우리집 손님인데… 반성했어. 머리 식고 보니까 창피하더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진솔하고 꾸밈없는 사죄였다. 에버렛은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밤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레슬리의 낯이 조금 전보다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잊고 있었어. 사과해줘서 고맙다...
4달 전 1913년, 여름 (5) (초고) 에버렛 혼은 레슬리 데클린에 대해 알 만큼은 알았다. 옥스포드의 다른 호기심 많은 남학생들이 아는 만큼은 레슬리에 대해 잘 알았고, 어쩌면 그 이상으로도 알 것이다. 예를 들자면, 레슬리 데클린은 아스파라거스를 싫어하고, 피하고 싶은 상황와 맞닥뜨리면 콧잔등을 긁으면서 크게 웃는다는 것. 그따위 것들은 에버렛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레슬리의 취향과 버릇이...
4달 전 1913년, 여름 (4) (초고) 그는 그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에버렛이 그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택의 본관 1층을 안내하던 세실리아가 갤러리 입구에서 갑자기 우뚝 멈춰섰기 때문이다. 에버렛이 왜 그러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얼굴을 감싸쥐더니 상하체를 역동적으로 흔들면서 글자그대로 ‘몸부림치다가’ 흐느끼듯 말했다. “…제발… 제발…...
4달 전 1913년, 여름 (3) (초고) “너, 이 새끼… 하다하다 훔칠 게 없어서 동생 스카프를…! 이거 파리에서 온거야.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둔 거라고!” “하지만 너보다 나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니?” “뭐? 아니거든?” “안녕, 씨시! 나 왔어! 레슬리, 그거 씨시 거였어? 어쩐지… 소재며 색감이 여성용에 가깝다 싶더라니….” “그래, 안녕, 앤소니 오빠. 야, 이 도둑놈 새끼야...
4달 전 1913년, 여름 (2) (초고) * * * 이 여름, 학업에 지친 대학생들에게 가장 달가운 시기, 몇 달간의 기나긴 방학을 요크셔 지방에서 보내게 된 것은 결코 에버렛 혼의 적극적 의지가 아니었다. 짧게나마 에버렛 혼의 이력을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스스로 레슬리 데클린에게 밝혔듯이, 에버렛은 런던 이스트엔드의 화이트채플 출신이다. 원래 출생지는 다른 곳이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쯤 먹...
5달 전 3장-4(프리라이트 초고) '추모 로봇.' 그것이 시장에서 통용되는 저것의 정식 명칭이었다. 장석현은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침구 속에 파묻었다. 베개와 이불에서는 관리 소홀한 싸구려 호텔방의 먼지 냄새가 풍겼다. 덧분에 웃음은 금세 사그라들고 코끝이 간질간질해졌다. '소중한 이의 기억을 당신 곁에 영원히 보존하세요. 고인들은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도 당신...
5달 전 3장-3(프리라이트 초고) * * * 「허므리니이다.」 「내 허므리니이다.」 「내 마사미 펴난티 아니하니이다. 해코져 하논 마사미 저고도 업스니이다.」 「내 워나논 거슨 고요히 주구미라. 빌오니 내 하오아 주거 가도록 버려 두쇼셔.」 * * * 잘 작동될까 의심했지만, 방수팩 성능은 장석현의 예상보다도 더 좋았다. 슬슬 바꿀 때가 된, 벌써 5년째 사용 중인 그의 구형 핸드폰도 방수...
5달 전 3장-2(초고) * * * "어휴,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하필이면 이놈의 방범벽 해지가 계속 말썽이 나서...." "아닙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유 있게 오시라고 하는 건데." "아뇨.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장 책임님은 젊은 분이 참 마음도 넓으시지...." "아닙니다...." 안내를 맡은 팀장이 계속...
5달 전 3장 - 1 오랫동안 비워둔 것처럼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집이었다. 작은 거실과 거기에 딸린 주방 하나, 남색과 흰색 배합의 이불과 시트가 엿보이는 침실 하나, 욕실 하나, 문이 꽉 닫힌 여분의 방이 하나. 남자는 그 냉기 가득한 거실 한쪽의 1인용 소파에 버려진 가구처럼 앉아 있었다. 버려진 가구처럼.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그 외에 남...
7달 전 3-4 * 대대적인 소탕이었다. 부랑자들과 범죄 이력이 있는 불량분자들, 일할 능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면서 오직 정부의 복지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빈민 나부랭이들을 몰아넣어, 제12 도시와 더불어 하위 도시 중에서도 가장 질 나쁘고 다루기 어렵기로 유명한 제11 도시. 3구역과 4구역, 그리고 5구역에서 설쳐대는 악명 높은 두 개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했다. 얼마...
7달 전 2장 (2026. 02. 02 수정) “그야 심해어잖아.” 김문영 보호사는 뭘 그렇게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투로 대답했다. 덕분에 질문했던 권영인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문영은 피로와 무뚝뚝함이 서린 표정으로 무심하게 대형 수조의 조도와 온도를 체크했다. 그러고는 수조 가장자리에 붙은 레버를 조작했다. 그녀가 레버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것에 따라 수조 안에서 기다란 뜰채가 죽은 물고기며 ...
8달 전 3-3 “내 페어, 내 바벨, 내….” 내 먹이. 륜은 헛숨을 들이켰다. 가까스로 억누른 단어 대신 들이마신 호흡 때문에 입가 근육이 파르르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쿠웅, 하고 한차례 맥박이 뛰어올랐다. 왼쪽 귓바퀴에 채워둔 제어기의 존재를 애써 의식했다. 모의 훈련이 종료되자마자 제자리에 끼워 넣었을 그 금속 피어싱의 존재를. “…목숨줄.” 간신히 그렇게 말을...
8달 전 3-2 웩, 우웨엑, 웨엑…. 목건련이 한쪽에서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능라가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투에 임하기 전에는 최대한 뱃속을 비워둔다는 목건련 자신만의 수칙 덕분에 걸쭉하게 소화된 음식물이 흘러나오는 참사는 면했다. 하지만 구역질 소리와 마른침 뱉어내는 소리는 어쩐지 다른 사람의 속까지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다들 토하고 싶다...
9달 전 3-1 하늘은 우중충했다. 당장에라도 한바탕 빗줄기가 쏟아질 것처럼 흐리멍덩한 날이었다. 습한 공기가 살갗에 쩍쩍 들러붙었다. 무너지고 부식된 건물들 사이로 무성하게 자라난 식물들이 폐허 위를 걷는 인간들을 굽어보았다. 성인 남자 손바닥 두세 개는 합쳐놓은 것처럼 커다란 이파리들만이 주변의 습기를 실컷 머금고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저 초록색 살갗을 가르면 달콤...
9달 전 2-11 한은 통 말이 없었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남자이긴 했다. 압생트에서 가면을 뒤집어쓴 채로 바에 앉아 술잔을 부딪칠 때도 그랬다. 그때는 입에 문 검은 구슬 때문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그 구슬 달린 가면을 핑계로 말을 적게 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륜은 첫 잔을 빠르게 비웠다. 종이봉투 안을 뒤적여 크래커를 꺼내고, 그 위에 절인 올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