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달 전 끝은 언제나 사랑이다 26. 6. 29. 서구가 참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제가 있을 때와는 풍경이 많이 달라졌어요. 아. 이 얘기는 이미 했던 것 같네요. 전 서구에 참 오래 있었답니다. 사람들 얼굴에는 절망과 희망이 펄펄 끓었어요. 전 그런 서구의 온도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용광로 같다니까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어요. 모르고 지내고 싶었죠. 다 깨진 도로와 미로 같은 골목을 잊고 살고 싶...
5달 전 살아 있음 26. 4. 6. “죽었네.” “망했다. 진짜 죽었어.” “에리히! 에리히!” 그들은 당혹은 잠시의 것으로 두기로 합의본 뒤 방에서 나가 ‘에리히’를 불렀다. 바깥에서 뭔가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빨리 좀 와봐 어쩌고저쩌고,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린 뒤 퍽 팔다리가 긴 남자가 달려와서 상황을 보곤 기가 차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황당해서 뭐라고 말도 안 나오네요.” ...
5달 전 끝은 언제나 농담이다. 26. 4. 5.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소년 시절의 그는 인생이 동화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었다. 실은 깨닫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가 유년을 보낸 곳은 정말이지 환상적인 분위기였으니까. 그곳의 사람들은 환상 속에서 살았다. 현실적인 인간(그것도 지상의 천출)이 받을 것은 멸시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생존하고...
5달 전 기분이 더럽다 26. 3. 30. 기분이 더럽다. 입안에 녹슨 못을 문 것 같다. 혀끝에서 쇠맛이 맴돌고, 목구멍 안쪽은 누군가 사포로 문질러 놓은 것처럼 까끌거렸다. 복도를 걷는 발은 멀쩡한데 걸음마다 속이 한 번씩 처박혔다. 이건 정말 엿같은 기분이었다. 바람이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봄이라고 부르기엔 얄팍한 저녁 공기였다. 시뻘겋게 데운 부지깽이를 삼킨 것 같았는데 바람을 쐬니...
6달 전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26. 3. 29. 남자는 요새 날이 서 있었다. 러스트는 도통 그러는 법이 없지만 남자는 달랐다. 완벽한 안락함 속에서 그는 천장에 매달린 칼끝이 목덜미에 스치는 기분을 받았다. 서늘한 뒷목과 거슬리는 불편함. 그는 위협이 되는 것을 분류하고 제거하는 것에 능하였으나 이 금속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판단 유보를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자리를 뜨는 것이다. 남...
6달 전 비명悲鳴 속의 비명悲命 26. 3. 18. 사람은 비명을 지르면서 태어난다. 우리는 이 삶에 비명을 지르며 왔다. 어쩌면 사랑이란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드리워진 얇은 베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짐승은 두렵거나 고통스러울 때 비명을 지르고, 아이들도 그렇다. 그러나 그 시기를 지난 인간은 더 신중하고 비밀스럽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이 아니고서야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6달 전 당신께 26. 3. 9. 당신께. 떠나기 전에 남깁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 짧게 남기겠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당신이 못마땅해하는 것 같으니 이번 편지는 부디 당신 마음에 차길 바랍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이번엔 큐브를 빌리지 않을게요. 방금 잠깐 펜이 멎었어요. 당신을 짜증 나게 할 말과 안 웃긴 농담을 다 거르고 나니까 적을 만한 말이 무엇인지, 제가 무엇을 남기고 ...
6달 전 집으로 가자 26. 3. 7. 나무 냄새와 깨진 유리 파편을 뒤로 하고 그들은 달렸다. 도시의 윤곽은 이미 오래전에 뒤로 밀려났고, 앞에는 낮고 긴 지평선과 바람에 말라붙었거나 아직은 푸르른 색들만 펼쳐져 있었다. 흙빛이 섞인 황금색 들판, 군데군데 듬성하게 서 있는 전신주, 이름 모를 작은 주유소와 낡은 간판들, 작동하는지 알 수 없는 공중전화 박스, 그리고 한참을 달려도 좀처럼 가까...
6달 전 국장님의 사격 실력이요? 재능이 넘치셨어요. 26. 3. 5. 쉿, 들리세요? 쿵, 쿵, 울리는 이 격발음 말이에요. 이건 기억의 권총이 우리 머리에 발사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세상을 잊을 수가 없고, 기다리는 사람을 잊을 수가 없고, 사랑을 잊을 수가 없고, 전쟁을 잊을 수가 없고, 고향을 잊을 수가 없고, 그중에서도 집. 집은 특히나 잊기 어렵죠. 우리는 이지-컷이라고 불리는, 플라스틱 비닐의 절단면을 뜯...
6달 전 삼월의 첫날 26. 3. 1. 공간의 주인이 떠난 집무실에 남자 하나가 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그는 디오라마의 관람자처럼 꽂힌 책과 매뉴얼, 업무 일람표, 끝이 조금 구겨진 종이컵따위를 고개를 숙여 면밀히 살폈다. 펜 위에 남은 지문 자국. 융선과 골이 선명한 것에 시선이 닿자, 그는 장갑의 지퍼를 내려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세포 단위로 기능하는 인간 개체의 미세한 단위가 자신에게도 ...
6달 전 크레딧의 무명자無名者 26. 2. 24. 피셔 시티는 혼란스러웠다. 연합 성전이 자본 꽤 투자한 영화의 화려한 엔딩 씬처럼 불꽃을 쁨으며 폭발한 뒤부터 늘 그랬다.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사건 사고 덕에 신문사의 편집장들은 헤드라인 문구를 고민하느라 연일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오늘은 피셔 원로원의 라파엘 헤르베르트가 자택 연못에서 발견된 날이었다. 아니다, 정정, 발견될 날이었다. 한 사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