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붉은 번개의 마검사 붉은 누전이 바닥을 기며 까득이는 소리를 내다가 사그라든다. 가볍게 부유하던 몸이 바닥에 내려 앉는다. 어떤 검이든 한손으로 휘두르는 무력을 가지고 있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묵직했으나 플로셰메우의 몸짓은 마치 새의 깃처럼 가벼웠다. 한손에 붉은 번개가 구체의 모양을 띠고, 검의 위에는 붉은 누전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번뜩이고 알 수 없는 아지랑이가 피...
일 년 전 평생의 장례 플로셰메우는 눈밭에 몸을 뉘인다. 흰 입김이 형태를 유지하는 듯하다가, 곧 잘게 부서져 사라진다. 분명 뼛속까지 냉기가 파고들어 지독하게도 추워야 했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무언가를 느끼는 것 자체를 박탈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박탈당함을 수도 없이 경험한 신체의 온도가 설원과 같아진 지 오래 되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끝은 옅게 떨려온다. 등불같은 ...
일 년 전 새로운 이름의 탄생 죽음은 탄생인가? 엘프족의 소수민족인 겨울엘프는 혹독한 추위와 마나가 휘몰아치는 산맥에서만 살았다. 그들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심판받았고, 죗값을 치르기 위해 설산 안에만 갇혀 있었다. 비옥한 대지로 내려갈 수도 없었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내려가면 죽음이, 올라가면 죽음보다 더한 혹독함이 기다리고 있던 탓이었다. 어쩌면 분쟁을 피하는 것이 습관이었으...
일 년 전 서른 한 번째. 서른 한 번째 제사였다. 플로셰메우는 겨울엘프의 제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정성껏 준비해온 옷가지들을 태운다. 그 다음으로, 잘 말린 과일들을 마법으로 태워 없앤다. 마지막으로 제 어깨에 걸치고 있던 겉옷까지 태우면 이 짧은 제사가 끝난다. 겨울엘프는 주변에 죽은 이가 있을 때, 조금 더 큰 겉옷을 입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깨끗한 옷과 소중한 과실을 ...
일 년 전 사랑하는 악몽 플로셰메우는 아득한 어둠 속에 있었다. 새카만 공간 안에서 느릿하게 눈을 끔뻑인다. 머리속이 온통 뿌옇다. 머리의 안쪽을 전부 다 뒤집어엎은 것만 같은 감각이다. 제 손을 들어 보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이 어딘지 인식조차 되지 않는 것을 보고 깨닫는다. 이곳은 꿈 속이구나. 드문드문 끊긴 기억이 떠오르며 이어진다. 전투 중이었다. 제법 강한 ...
일 년 전 겨울밤의 자손 가끔은 생각이 너무나도 무겁게 몸과 영혼을 짓눌러, 이 차갑고 묵직한 눈밭 위에 몸을 눕혀야 하는 날이 온다. 그렇게 바닥에 몸을 뉘이면, 눈의 차가운 향과 희미한 들풀의 향이 폐부 안쪽까지 스며든다. 무거운 것, 무거운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모두가 외면한 것을 이고 가는 것이고 잊어버린 것을 홀로 기억하는 일이고 잃어버린 것을 두 손을 평생 바닥을 ...
일 년 전 겨울 한 조각 1 아, 이 빌어먹을 세상…. 이곳에는 좋은 게 단 하나도 없다. 악몽도 추억도 다 애매하게 기억하고 잊어버리게 되었다. 온전히 기억나는 게 없다는 것이 나를 말 그대로 미치기 일보 직전으로 만들었다. 전생前生을 믿는가? 애초에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정신착란적인 그 모든 장면이 이전 생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갓난아기 때부터 떠올릴 수 있는...
일 년 전 Hiraeth :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한 그리움 플로셰메우는 고향을 떠나온 마음을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쓸쓸한지,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혹은 얼마나 처절한지. 하지만 평생 붙들 수 있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언젠가 반드시 떠난다. 동정하지 않고는 못 견길만한 이야기를 해도 말이다. 그러니 그는 훈련된 검사로서, 한때는 심판자라는 이명을 뒤집어쓴 존재로서, 그리고 한 명의 단단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일 년 전 사랑하지 못할 과거 산들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모든 것이 쓸려나갈 것만 같은 감각에 휩싸이면, 플로셰메우는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겨 어딘가를 찾아간다. 손끝에 느껴지는 기묘한 흐름을 휘어 잡는다. 누군가로부터 초대받았음을 강렬하게 암시하는 것을 본 플로셰메우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암시 쯤이야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초대를 보낸 주인과 나름대로 친밀...
일 년 전 환상과 선택의 강요 회색 안개가 휘몰아친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다. 플로셰메우의 검에서 붉은 번개가 흐르다가 사라진다. 방향감각이 상실됐다. 검을 잡지 않은 손을 한 번 움직여 본다. 환상 마법. 손끝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온다. 빛이 안개 속을 밝힌다. 이상한 마법에 걸렸구나, 얘야. 겨울천사가 플로셰메우의 옆에 떠다닌다. 지금 제가 의식을 잃은 상태입니까? 플로셰메우는...
6달 전 창조된 생명 평범하게 배울 수 있는 주술. 금지된 주술. 금단의 지식. 세상과 완벽히 유리되어 고고함을 지키던 종족에게 있어 세상의 기준이란 힘 없는 정의에 불과했다. 그들은 마족만큼 무자비했다. 수많은 생명을 도륙을 내고 그 위에 평화의 왕국을 세운 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역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들었다. 그들이 벌인 짓 중에서 가장 ...
6달 전 호문쿨루스 생명 실험의 눈부신 결과물이자 한 집단의 과오. 오랜 시간을 살도록 설계되었으나 오랜 시간을 버틸 마음을 받지 못한 존재. 세간에선 그것을 호문쿨루스라고 불렀다. 종족: 뱀-엘프 호문쿨루스 현자의 돌에 엘프의 정수와 뱀 수인의 정수를 넣어 만든 괴물. 처음에는 바닥을 기는 미물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뱀 수인의 서늘한 ...
6달 전 란타나 화원이 지평선을 따라 길게 늘어져 오색찬란하게 물들어 있다. 아름다운 꽃들에서 생명이 잉태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형태를 갖춘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모든 화인들의 우상이자 앞길을 밝히는 존재, 이 아름다운 선인의 이름은 란타나이다. 란타나. 끝없는 화원이 잉태한 첫 번째 꽃. 모든 화인의 어머니이자 선인, 아름다운 생명. ...
6달 전 Kirce 주술을 부리는 마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잔혹한 마법을 부리는 자. 소원과 목숨의 등가교환을 이루어주는 존재. 세간에선 그를 키르케라고 불렀다. 키르케. 매혹적인 허니 블론드 색의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허리까지 내려오고, 자수정 빛깔의 눈동자는 깊고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동공은 루비의 색을 가지고 있고, 약한 장밋빛 홍조가 오른 뺨은 사랑스럽기까지...
5달 전 미물에서 인간으로 라우르스는 제 동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콧대 높고, 오만하고, 자비를 모르는. 한 종족에 대한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지만, 평균값이 만들어진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많은 사람과 마주하고, 동족을 마주하면서 엘프에 대한 편견이 왜 그토록 컸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가끔은 같은 엘프인 자신의 눈에도 끔찍한 광경이 ...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