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달 전 이제는 지나온 일이라서. 레인은 과거로 돌아가지도, 돌아보지도 않는다. 두 개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리워하며 안주하고 싶다는 뜻이고, 돌아본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풍경을 짚으며 눈물짓고 웃음을 짓는다는 것이다. 레인은 둘 다 하지 않았다. 돌아갈 과거도, 돌아볼 과거도 없다. 그 어떤 추억도 없다. 그러니 가치도 없다. 복수를 끝내고 난 뒤 어떤 심정이었는지 떠...
일 년 전 슬픈 날들은 전부 지나가며 그렇게 바람에 실려 날아가니 네이시는 문득 달력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달력 한켠에 표시하지도 않은 날이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기일.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을 때 영영 사라져버린 엄마와, 그런 엄마를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고 영영 사라져버린 아빠. 운명이라는 것이 얄궂게도 둘은 같은 계절 안, 비슷한 날에 떠났다. 네이시는 가만히 생각한다. 부모님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은...
일 년 전 평범한 아침 넓은 대로와 하늘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아침이다. 네이시는 짧은 하품을 한 번 하고 조심히 일어나서 창밖을 확인한다. 새벽에 빗소리가 들리나 싶었더니 안개가 가득했다. 밝은 햇살이 고개를 내밀지 않은 것은 영 아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꿈나라에 있는 델피니아를 한 번 보곤 웃음을 머금는다. 살금살금 방 바깥으로 나간다. 먼저 간단히 세수하곤 부엌...
9달 전 슬픔의 요새 얼굴 없는 괴물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이드렌자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제자였고,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친구이고, 누군가의 얄미운 친구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누군가에게. 사랑은 죽었고, 과거는 지웠다. 이제는 낯선 글자들만이 입안에 들어온 모래 알갱이처럼 서걱거렸다. 소중한 사람끼리 불렀던 애정 어린 별명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코드명으로 전락했...
2달 전 바깥에서 한 끼 어때요? 레트레인 200일 기념 기념일이 단순한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 날로 전락한 것이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레인에게는 그 어떠한 기념일도 남지 않았다. 쓸모가 없었으니까. 수많은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거짓된 생일이 몇 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그저 주어진 신분에만 충실했던 나날들 속에서 진짜 생일은 망각해 버린 순간, 아주 우연히, 생각지도 못한 인연으로 인해 지난 것들을 ... 1
일 년 전 평범한 나날 델피니아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침부터 새로운 꽃과 화분이 들어왔다. 꽃집을 한 지 좀 되긴 했지만, 체력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붙을 리가 없지. 그래도 꽤 해본 일이라 익숙해져 다행이었다. 델피니아는 꽃의 종류를 살피다 화분을 들었다. 곧 문이 가벼운 종소리를 내며 열린다. 익숙하고 발랄한 걸음으로 다가온 네이시가 옆에서 다른 화분 하나를 가볍게...
일 년 전 신앙과 사랑 모든 선함의 징조와 징후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종교가 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잘 빚어진 수단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 데 합리화가 필요한 것들. 인간 사냥과 전쟁, 피와 오물로 뒤덮인 끔찍한 역사, 무언가를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모든 것들은 신앙이라는 합리화가 가능한 수단에서 온 ...
일 년 전 자컾 2p 모음 (1) 한헬렌 헬렌은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가족은 의미가 없었고, 소중한 친구도 별로 없었다. 누군가를 구할 때 큰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그것만이 익숙했다. 가치와 쓰임새로 살아가는 게 가장 마음이 편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가면 판단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무언가를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지...
일 년 전 짧은 사색 바닥을 기듯 퍼지는 황금색 선율을 천천히 되짚어 본다. 로브를 눌러쓰고 거리에 서있던 자는 꽃집 안으로 들어선다. 미리 주문했던 꽃다발을 받아든다. 꽃집의 주인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꽃집이 처음 들어설 때부터 꽃집에 들려서, 한 달,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꽃을 사가곤 했다. 매번 다른 종류의 꽃을 사가고 또 몇 번은 같은 꽃만을 사가기도 했다. ...
9달 전 Hydrangea 수국(水菊): 냉담과 무정 hy·dran·gea. 하이드렌자. 악착같은 여자, 괴물 같은 여자, 천의 얼굴을 가진 여자, 슬픈 여자. 부대 내에선 이름보다 더 잘 알려진 별명이다. 부대 내부에서 그를 잘 아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지만. 이제는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이름은 먼 과거에 서류에 붙어있던 쓸모없는 알파벳의 나열일 뿐이었다. 레인(rain)이라는 코드명이 ...
9달 전 평온함의 끝 레인은 거친 숨을 내쉬다가 삼켰다. 우울한 도시의 뒷골목에는 적요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골목길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그런 피비린내는 골목길에서는 흔한 향기였다. 상류층 사람들이 뿌리는 향수는 그 어떤 피비린내도 이기지 못한다. 손에 든 칼을 떨어트린다. 손끝에 있을 지문은 먼 옛적에 훼손한 채였다.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
8달 전 언젠가의 미래에 월하미인.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밤에만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 그는 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기억하는 첫 순간은 길거리였다. 집도, 가족도 없이 홀로 남아있던 순간이 그의 첫 기억이었다. 그 기억이 평생을 좀먹어간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화가 난 채였다. 불편한 친척 집에서 살았고, 길가를 떠돌며 노점상을 도우며 돈을 벌었다. 연약한 몸은 ...
7달 전 같이 게임하기 아윤크로 일상 아윤은 길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노점상이 보였다. 이 근처에서 종종 보던 노점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햇살을 받고 반질반질 빛나는 플라스틱 장난감이 눈에 띄었다. 아, 예전에 많이 했던 건데. 장난감 두 개를 집어 들고 구매한 뒤 주머니에 쏙 넣었다. 크로커스에게 줄 생각에 얼굴에는 나긋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아윤은 크로커스가 어...
8달 전 혹독하고 아픈 거리에 비가 쏟아졌다. 길거리에 놓인 가로등이 깜빡거렸고, 레인은 우산도 없이 어두운 길을 걷는다. 어깨에서 홧홧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으로 어깨를 짚자, 찢어질 듯한 격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익숙한 통증이었으나 그것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파서, 너무 아파서 다른 표정은 지을 수 없는 것이었지. 레인은 핸드폰을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누...
7달 전 자관 룬타로 (1) 레트 레인 - 불안정하고 아름다운 사랑 레트로 레인도 꽤 바쁘게 살아온 인물로서, 지금은 둘 다 제대로 된 휴식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 뻣뻣하게 굳어있는 레인을 레트가 풀어주고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레인은 그런 레트를 믿을 수 없다가도, 또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레인은 이런 믿음...
7달 전 자관 룬타로 (2) 미하일 셀레네 미하일 > 셀레네 믿을만한 동료이고 둘도 없는 파트너입니다. 여러 의미를 포함해서요. 미하일은 셀레네를 깊이 신뢰하고 있어요. 미하일은 셀레네의 선함에 이끌렸고, 또한 그 선함이 세상을 더욱 좋게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겠죠. 셀레네 > 미하일 미하일은 셀레네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외...
5달 전 자관 룬타로 (3) 야매 룬타로이니 재미로 즐겨주시길... 아윤 크로커스 (연애 전) 지금 상황 : 에이와즈 (세계수, 오래된 문제, 부정한 영향력의 추방, 뿌리깊은 원한, 망자와의 연결 등) 이 룬이 가리키는 세계수는 세계를 지탱하는 위그드라실이며, 세계-우주-의 중심축이며 기둥이에요. 생명과 장수, 보호의 의미와 함께 죽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삶과 죽음이 얽힌 세상에서,...
3일 전 가을맞이 단장 어느새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왔다. 크로커스는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을 보다가, 걸음을 옮겨 방문을 살짝 열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는 아윤이 크로커스를 보자마자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왜요, 크로? 머리 말려주려고요? 약간 농담 섞인 질문에, 크로커스가 금방 곁으로 온다. “머리카락 말려줄까요?” “해준다고 하면, 거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