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전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 “그러고 보니…. 내 의뢰는, 왜 받은 거예요?” 라줄룸이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일말의 빛도 남지 않은 어둑한 붉은 눈동자에, 작은 빛이 스친다. 라줄룸의 질문에 백하꽃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와서 그게 왜 궁금하냐는 듯한 행동이었다. 대답의 회피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그런 질문이 꽤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서로의 사정을 들여다본 것... 52
일 년 전 이채의 실바람 다른 사람들보다 이상한 것을 더 잘 본다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잘 보는 것 절대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평범함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기준이 넓어도 너무 넓은 탓이다. 그러니 개인의 잣대로 다른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었지. 하지만 그럼에도 수련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잣...
일 년 전 영원한 슬픔과 멀어지는 마음 곧 흘러내릴 것만 같은 부드러운 실크로 만든 원피스, 그 위로 화려하게 두른 청색 보석들, 보석에 파묻혀서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 외모. 그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를 아름답다고 여겼다. 고운 목소리, 고운 춤선, 그를 이루는 요소 중 그 어느 것도 곱지 않은 것이 없었다. 태생과 어울리지 않게, 천한 출신과 다르게. 그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닌다는 것만 ...
일 년 전 자유와 바람의 상관관계 어쩌면 파도나 하늘 따위를 닮은 것이라고 하늘에 파도같은 바람이 넘실거린다. 흰 머리칼이 바람에 마음대로 나부낀다. 파도와 하늘을 담아놓은 듯한 투명한 눈은, 너무나도 투명해 보여 되레 속내를 알 수 없게 만들 정도였다. 손끝으로 머리칼을 대충 넘긴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앉아있던 몸을 일으킨다. 성당 안에선 마린이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족의 손에 이끌려 온 것뿐이었다. 특별한...
일 년 전 떨어지는 빛 그것을 낙화로 기억하기에 카린은 혼자 연습실에 누워 있었다. 전날부터 혼자서 수많은 것들을 되새기듯 말하고 있었다. 실수하지 말자. 상처받지 말자. 고작 17살 된 사람이 이런 말들을 내뱉는다. 15살에 혜성처럼 나타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15살 이전부터 수없이 연습해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카린은 실수하지 않는다. 실수하더라도, 최대한 ...
일 년 전 내일이 없을 것처럼 하지만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오랜만에 찾은 병원의 구조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한때는 매일같이 찾아오던 곳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많은 것들이 바뀌면서 쉬이 찾아오지 못했던 곳이기도 했다. 펜비는 천천히, 조급하지 않은 걸음으로 어느 1인실의 앞에 선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병실 내부는 고요하다. 삭막하게 하얗다.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이 병상에 다가서면서 조금씩...
일 년 전 기계의 영혼 비숍은 기술자인 소피엔에게 구해진 이후로 계속 같이 지내고 있었다. 소피엔의 일을 돕기도 하고, 옆에서 대화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지금까지 지내오며 대화를 나눈 바로는, 소피엔은 한낱 기계에게도 온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꼭 영혼이 있는 것처럼 대하기도 했다. 그 점에서, 비숍은 소피엔을 신기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비숍이라는 이름도 소피...
일 년 전 표백된 의지 라야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마을의 수호석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수호석에 깃든 힘을 읽고 보강하는 것에는 상당한 노력과 재능이 필요했다. 아직 10대 중반 쯤 되던 라야가 수호석을 고치러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이유는, 수호석을 다루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력을 압도하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도 겸손할 줄 알...
일 년 전 보고 싶었어 몇 번이나 그렸어 체튼은 바닷가의 향기를 좋아했다. 짭짤한 소금의 냄새, 후덥지근한 바람이 쓸어낼 듯 밀려오면, 체튼은 자유를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자유롭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치열하며 비루한지…. 혹은 그랬던 탓에 더 아름다웠던 건지. 푸름 섞여 든 회색빛의 머리카락이 연기처럼 흩날리고 있노라면, 어느덧 옆에 익숙한 온기가 다가온다. 머리카락 ... 5
일 년 전 온기가 휘영청 뜬 밤 완연한 구의 형태를 이룬 달이 하늘 높이 휘영청 떠 있었다. 곤히 잠을 자고있던 아이는 문득 눈을 뜬다. 달빛이 얼굴에 닿는 것에 잠에서 깨버린 것이다. 그 아이가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도로 수마에 몸을 맡겼겠으나, 이전의 생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던 아이는 얼굴에 잔잔히 떨어지는 월광에 느지막이 상체를 일으킨다. 졸음이 천천히 밀려들다가 쓸려나가는 붉은 ...
일 년 전 영웅을 이해하는 것 잠시 열어둔 성당의 문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온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다가, 부지런히 성당 안의 청소를 시작한다. 아침의 성당은 온통 고요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가 머무르고 있던 성당은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아직 청소년에 불과한 그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가 원한 일이기도 했지만...
일 년 전 잃어버린 슬픔 그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족이 죽어 홀로 남겨진 자는 갈 곳을 영영 잃어버렸고, 그래서 그들이 죽은 원인을 조금이라도 없애고자 했다. 그들이 사라진 이유를 생각한다. 마물에 의해 죽었다.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는, 대지의 오염에 있었다. 오염으로 인한 괴물의 탄생이었다. 그 오염을 정화하면 마물의 수가 줄어든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연현...
일 년 전 기나긴 상처를 건너 다정은 빛을 잃지 않는다 티타라는 여전히 두려웠다. 무엇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이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죄스럽게 느껴지는 온기와 애정, 인간으로 태어나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티타라의 영혼은 어린 시절 부서졌다. 신을 향한 광신적인 믿음과, 기어이 스스로를 제단 위에 올려버린 가족들을 기억한다. 생에 첫 기억은 광신적인 믿음에 겁먹어 기도한 것이고, 그 다음 기억은...
일 년 전 희생의 이유 검을 손에 쥐었던 첫날을 기억한다. 첨예한 칼날의 끝에 찢어지던 마물, 무언가를 베어 넘기는 감각, 흰색 눈에 진득하게 스며들던 피. 이겨낼 수 없다면 패배자가 되고 실패자가 되어버리던 순간들. 폭력과 피의 기억이 릴리 윈터를 냉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검무를 이루던 자는 못하는 것이 있으면 안 됐다. 필사적인 생존의 기억이었다. 릴리 윈터는 그 무...
일 년 전 약속한 것은 여전하게 담홍과 판도라는 지난 날을 기억한다. 상처뿐이던 날들과 안도감을 기억한다. 담홍은 과거로부터 오는 모든 추억과 잔향, 웃음, 강렬한 햇살과 뛸 듯이 기쁜 마음을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러니 상처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슬픔과 고통, 괴로움, 다 무너져내린 마음과 아득한 상처는 언제나 담홍의 생에 깃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웃는 이유가 있느...
일 년 전 언젠가의 설움과 염원 하지만 용서한다, 그것이 그들의 영혼이었으니. 페리도트는 깊은 밤에 홀로 걷는다. 설원을 홀로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에 가까웠으나,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밤 산책을 즐겼다. 이 추운 곳에서 무슨 산책이냐는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다만 페리도트는 밤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손에 한가득 들고 있던 따뜻한 옷가지들과 음식이 천천히 식어간다. 전부 다 식어버리기 전에, 밤 산책의 동선이 겹친 다른...
일 년 전 느긋한 바람이 불어오며 은하는 서글픔을 알았다.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절망감과, 그럼에도 무언가를 바꾸려고 노력하던 처절함을 알았다. 그래서 은하는 최선을 다했다.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것에 저항하려고. 모든 순간이 고요한 투쟁이었고 치열한 전투였다. 은하의 생이 그랬다. 그의 생은 안쓰럽고 애틋했다. 처절하게 고통스러울지언정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일 년 전 능소화를 닮은 사랑 녹색 가득한 숲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그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발치에 풀잎이 스친다. 파랑과 분홍꽃잎, 노랑과 풀잎이 뒤섞인 두 개의 눈동자가 자연의 숨결 안에서 강렬하게 빛난다. 희게 드러난 맨발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그것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곧 손에 든 우산을 높이 들어 펼친다. 물살이 바람을 타고 화살처...
일 년 전 기묘한 평화 손이 축축하다. 긴장감과 토혈이 뒤섞여 어지럽게 흩어진다. 몸에 느껴지는 육중한 무게감에 정신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납게 일렁거렸다. 셀린은 단검을 움켜쥐다가 목덜미를 물려고 시도하는 것의 목을 깊게 찌른다. 검을 빼는 행동에 따라 검 보랏빛 피가 옷을 적신다. 옷을 단단히 입어서 다행이다. 적어도 마물의 체액에 묻어 추가적인 부상을 피할 수 있었으...
일 년 전 모방과 침묵 지익, 지이익…. 바닥에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검은 마스크와 푹 눌러쓴 모자, 거기다가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답답할 법도 했지만 전혀 신경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 목표는 조금 무겁나. 피같이 붉은 눈동자가 손에 잡힌 것을 본다. 시체는 제법 험한 꼴로 죽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죽은 것을 잡...
일 년 전 바람이 부는 저녁 하나, 바람이 분다. 둘,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바람이 마음껏 나부꼈다. 하늘은 주황색과 담홍색을 머금고 있다. 어두워지는 파랑이 담홍빛 하늘에 서서히 밀려든다. 물살처럼. 포말처럼. 서서히 흐려지고 잊히는 추억처럼. 그는 이 하늘을 알고 있다. 어두워짐과 밝음이 한없이 공존하는 시간. 장밋빛, 담홍빛, 무어라 불러도 좋을 이 하늘 아래...
일 년 전 짧은 대화 데네브는 바깥에 서 있었다. 얼마 전에 맡은 호위 임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부에서 하던 일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평화로웠고, 피비린내는 전혀 나지 않았으며, 끔찍하게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이 평화로움 속에서 하나의 문제라면, 꿈속에선 자꾸 죽은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데네브는 죄책감을 알았다. 그것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망치는지도 알았고, 어떻게 ...
일 년 전 사탕과 침묵 연화는 용병 일이 끝날 때마다 바깥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누군가를 만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연화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누구를 만나도 잘 대해주었다. 연화는 남부의 도시 바깥의 사람이었다. 도시 바깥이란, 남부에 적용되는 수많은 규칙이 조금은 덜 적용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슬럼가였다. 치안이 나쁜 것은 당연했고, ...
일 년 전 원망과 축복 깜빡, 깜빡…. 눈꺼풀에 납덩이를 얹어놓은 듯 무거웠다. 어느 순간에 또 의식이 끊겼나.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표정이 어땠더라…. 캘세더니는 숨을 길게 내쉬고 들이마신다. 통증이 심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숨을 쉬려고 했다. 병원 내부의 소독약 냄새가 풍겼다. 호흡이 천천히 안정되고 나면, 온몸에서 욱신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끔찍한 생체...
일 년 전 가치 없는 과거 밴시는 폭력 속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폭력의 경험 앞에서 밴시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그저 그러한 폭력에 순응하며 사는 것뿐이었다. 누군가가 동정하지도 않고, 동정할 필요도 없고, 슬퍼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주지도 않는 게 밴시의 어린 시절이었다. 인생은 가치 없지,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지.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
일 년 전 최악의 겨울 上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정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던 때가 있었다. 릴리 윈터는 다정함을 느낄 줄 알았고, 베풀 줄 알았고,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혹독함과 매정함으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세우며 단련하고, 고된 훈련으로 자신을 강하게 만들 줄 알았다. 약간의 피와 살을 내어주고 웃음을 지킬 수 있다면, ...
일 년 전 지옥같은 침묵 엘피다는 북부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만큼 북부를 들여다볼 줄 알았다. 어린 시절, 이름 모를 용병이 자신을 돌봐줬던 경험이 있던 탓에 더더욱 그랬다. 다른 북부인들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엘피다는 그것을 다행이면서도 불행이라고 여겼다. 악행을 하는 것에 늘상 경계심을 가질 수 있어 다행이었고, 하지만 그러한 악행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불행이었고…...
일 년 전 추억의 조각남 (1) 어느 날부터, 클루디는 단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입안에 질척하게 달라붙는 감각을 싫어했다. 끈적한 것도 별로였고, 입안에 잔여물처럼 남는 맛은 더욱 싫었다. 향기가 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함께 나누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만들고 나누게 되는 것이 꺼려졌다. 추억이라는 건 한번 깨지면 다시는 ...
일 년 전 두 개의 반지 클루디는 장신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걸리적거린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언제나 손가락 크기에 딱 맞아 빠지지 않는 반지 두 개만 가지고 있었다. 양손 검지에 하나씩. 하나는 오랜 친구이자 가족인 이와 맞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혼자만 간직하다가 종종 끼는 반지였다. 한쪽은 소중해서 늘 끼고 다녔고, 한쪽은 소중해서 끼고 다니지 않았다. 둘의 차이...
일 년 전 아픔을 견디는 것 이 세상에서 전투 능력이 없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어떤 부분에서 특출난 능력이 있거나 전투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상처를 입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통하기도 했다. 아무리 심하게 다치거나 아파도, 눈 깜짝할 새에 낫는다면 한낱 부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아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치유사이자 해주사였다. 해주사란 주술사와 비슷...
일 년 전 추위와 적막 항상, 물 속에 잠겨있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것을 할 때에는 두려움이 앞섰고, 미처 슬퍼할 시간도 없이 계속 무언가를 해내야만 했다.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었다. 무엇을 그렇게 증명해야만 했나? 개인의 쓸모, 효용성, 비관할 시간에 계속 걸어나가는 꿋꿋함을 끊임없이 내보인다. 상처됨을 앎에도 끝내 외면하면서. 기실은 그저 돌아보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
일 년 전 요정의 사랑 살아가면서 재미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밴시는 무료한 눈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지루함이 가장 크게 느껴졌고, 그 어떤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하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게 가장 재미없으니까. 밴시는 항상 혼자 다녔다. 정말 되는대로 살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위험이 넘치는...
일 년 전 한때 담홍색이던.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어? 사실 지키던 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에 대해서. 무의미는 또다른 무의미가 되는 곳에 대해서. 지킬 수 있다는 착각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득불 끌어안던 것은 사실 다 썩어버린 것이고, 티끌만큼의 가치도 없고, 가족이라는 건 사실 그렇게 소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 게…. 산제물로서 춤을 출 때... 5
일 년 전 고향에서의 방출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기울인다. 발에 소름 끼치게 차가운 물이 떨어진다. □□는 잠시 몸을 움츠리다가, 어두운 방 안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에 젖은 발이 작은 발자국을 남긴다. 차갑고 흰 대리석 벽을 천천히, 느릿하게 따라 걷는다. 성인도 다 외우기 힘든 성경을 천천히 읊는다.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계속 걷는다. 더 이상 다리와 발이 아...
일 년 전 최악의 겨울 下 릴리 윈터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생각한다. 겨울. 끝없는 겨울. 끝나지 않는 겨울. 상처뿐인 겨울. 이 빌어먹을 곳은 춥지 않았던 적이 없어 자꾸만 몸을 웅크리게 된다. 자기 보호와 안식, 타인의 생명을 저울 위에 올려둔다면 제일 가벼운 것은 언제나 자신의 안위였다. 지키기 위해서 든 검에 지키고자 했던 자들의 피가 묻는다. 신록을 닮은 선명한 녹색의 눈동...
일 년 전 신 생일축전 안녕, 사랑하는 내 동생! 간밤에 잠은 잘 잤어? 좋은 꿈이 찾아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내가 가장 먼저 생일 축하를 해주고 싶어서야. 스물네 번째 생일을 축하해! 오늘도 즐거운 일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변함없이, 언제나 너의 삶을 축복해.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많겠지만 그만큼 웃을 일이 더욱 많았으면 좋겠어. 음, 예전 이야기... 15
일 년 전 재앙신과 유령 휘는 이 모든 것에 가치라고는 없다고 여겼다. 대부분의 인간이 끔찍하게 혐오스러웠다.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것에 희생당하는 사람들,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을 보고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약한 것은 짓밟힐 수밖에 없었다. 상처뿐인 모든 것들이 이 진창에서 의미를 잃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것을 깨달았다. 이 삶은 지옥이라고. ...
일 년 전 유령과 재앙신 숨이 물먹은 듯 축축하다. 명은 계속 끊겼다가 이어지는 의식 속에서 숨을 힘겹게 내쉰다. 몸 위에 덧그려진 주술진이 흐려지자, 휘는 다시 주술진을 덧그린다. 피부 위에 주술진이 빼곡하게 들이차며 불길한 빛을 내뿜는다. 휘의 몸 위에 새겨진 주술진은 매번 새로 덧그릴 필요가 없었지만, 문제는 명의 몸 위에 새겨진 주술진이었다. 죽어가는 몸을 강제로 살려놓게 ...
일 년 전 찰나의 영원성 동부에도 눈 섞인 바람이 불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비는 눈이 되었고, 바람이 불면 그 흐름에 눈발이 섞이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닌가?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그렇듯,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담홍은 이 겨울이 슬프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끝을 향해 걷는다. 죽을 것을 앎에도 살아간다.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간다. ...
일 년 전 한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잠깐의 안온과 안녕 감았던 눈을 뜬다. 고향의 짠 바닷바람이 아니라, 다른 어떠한….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것이 느껴진다. 연화는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본다. 숨이 끊기던 감각 이후에 어렴풋하게 남아있던 의식. 끊기지 않았던 의식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다. 다만 다른 감각을 남긴다. 오로지 상처뿐이던 순간이 있었다는, 무언가를 상처입히고 말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
일 년 전 작은 고민과 대화 서부에 비가 쏟아지는 날은 꽤 드물었다. 언제나 서늘하며 건조했고, 오염이 씻겨나가지 않는 곳이었던 탓이다. 적지 않은 서부인들은 비를 반겼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매캐한 연기 같은 것들마저 빗물에 사라지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서부의 공기는 약간의 위험인자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숨 쉬는 것조차 위협이 되곤 하는 땅이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이 오염을 씻...
일 년 전 수풀 속의 눈보라 순하고 부드러운 사람. 상처 하나 내지 못할 것 같은 사람. 꼭 여린 꽃잎 같은 사람. 수아는 타인에게서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 익숙했다. 수아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맞았다. 상처를 내지 못해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못했고,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를 곳에서 전투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은 취약점을 가지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수아...
일 년 전 작은 사고? 맑은 햇살이 매끄럽게 비쳐 들어와 가게 내부를 가득 채운다. 신은 부드러운 햇살이 가득찬 가게의 안에 있을 때면 가족들을 생각했고, 그들의 열렬한 애정과 자신을 향한 모든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라던가, 모자람 하나 없는 햇살같은 웃음이라던가. 원체 다정한 사람들이니까.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면서 자신의 공간을 깔끔하게 정... 30
일 년 전 꿈 없는 잠 집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이제 막 새벽에 접어든 바깥보다 집안이 더 어두운 것만 같았다. 클루디는 이제 막 씻고 나온듯한 상태로 머리칼의 물기를 털어낸다. 오늘따라 유독 힘든 의뢰가 연달아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던 탓이다. 머리칼을 수건과 따뜻한 바람을 쐬며 말린다. 허기진 기분이 들었지만 무언가를 차려먹을 힘이 없었다. 많아지...
일 년 전 함께할 수 없는. 이름 하나만 새겨진 무덤 앞에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곧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수아는 표정 없는 얼굴로- 혹은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무덤을 바라본다. 어떤 슬픔이나 고통은 차마 표정으로 표출하지 못한다. 아우성이나 비명은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다. 수아는 생각이 많아질 때면 종종 이렇게 이름만 멀끔히 새겨진 무덤 앞에 찾아오곤 했다. 오랜 친구의 무덤이고,...
일 년 전 죽음같은 휴식 클루디는 서부의 매캐한 바람을 쐰다. 순백색의 머리카락이 시원스럽게 흩날린다. 적막하고 고요한- 모든 마음이 흐린 눈동자는 이곳저곳을 노니는 습관마저 없었다. 못박힌 듯 서있다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적막과 소음의 아이러니를 한참이나 곱씹다가…. 클루디는 목끝까지 덮고 있는 옷깃을 꾹 여민다. 작은 체격에 비해 큰 옷자락이 몸을 푹 덮는다. 마치 담요처럼...
일 년 전 무제 숨을 쉰다. 눈물의 향기가 느껴진다. 클루디는 작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발치를 쳐다본다. 검은 바닥이 질척하다. 꼭 피에 젖은 피부처럼. 꼭 그때의 풍경처럼. 눈앞에 자욱하게 깔린 죽음을 기억한다. 갑자기 특정 지역의 오염이 극심해졌고, 심해진 오염이 터져 나왔다.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구역이라 다행이었을까. 그럼에도 죽은 사람이 ...
일 년 전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날 햇살이 집의 안쪽에 서서히 스며든다. 신은 가을의 끝자락에 놓인 날에서 유독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눈꺼풀이 햇살에 살포시 떨렸지만, 곧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손이 신을 더 깊은 잠으로 이끈다. 괜찮아, 더 자도 돼. 아, 다정한 언니의 목소리. 신은 엷은 숨을 내쉬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깬 건 그보다 몇 시간 후였다. 오랜만에 늦잠... 17
일 년 전 지나가는 사람 클루디는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남들은 기억하지 못할 모든 순간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말을 할 수 있기도 전의 기억들. 그 기억 속에는 분명 괜찮았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상처가 더 많았다. 분명 기억한다. 괴물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 밤하늘의 별을 읊어준 목소리와 괴물이라고 소리치던 이를 기억한다. 괴물이라. 클루디는...
일 년 전 죄 없는 자 죽거나 다치기 쉬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지키고 도와주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고 했다. 녹트는 제 이름만 겨우 부지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그 역시 누군가의 손을 원하지 않았다. 가치가 없다. 누군가를 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살아남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언가를 마음대로 동정하는 존재이며, 안타깝게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한... 26
일 년 전 무제 W는 용병 몇 명과 함께 지하 갱도의 입구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온 참이었다. 인적이 드문 갱도였고, 그렇기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상에 빛과 어둠이 있듯,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도 빛과 어둠을 동반한다. ...
일 년 전 즐거운 만남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분다. 이제 정말 겨울이 왔는지 한참 쌀쌀해졌다. 캘세더니는 도톰한 옷을 더욱 꼭 감싸쥔다. 은은한 열기가 맴도는 몸이 덥다가 추웠다. 그 실험이 끝난 이후로는 늘 이랬다. 몸 안에 가득찬 염증과 오염 때문에 계속 이럴 거라고 했다. 그래도 남부가 다른 곳보다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사시사철 추운 곳이었다면 너무 힘들었을 것만 같았다. 캘... 35
일 년 전 추억의 조각남 (2) 클루디는 클레나의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 울지 않으려고 했다. 죽은 자의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고,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가장 원하지 않는 형태로 돌아왔고, 클루디는 그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너지더라도 걸을 수 있다. ...
일 년 전 무제 Trigger Warning 아동학대, 폭력 실험의 은유적 표현 심리적 압박 작은 아이는 어두운 방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바닥과 벽면에 차가운 한기가 흐른다. 아이는 누더기 천 더미를 끌어안는다. 높은 창문 바깥에는 회색이 가득했다. 자주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자주 들어왔다 나간다. 아이는 몸이 자주 아팠다. 병에 걸린 건 아니었다. 단지, ...
10달 전 그럼에도 기쁨을 아는 것 은은한 빛을 내뿜는 비도가 쐐기처럼 날아가 마물에게 꽂힌다. 제법 깊이 파고든 비도가 괴로운 듯 몸부림치다가 곧 쓰러진다. 들키지 않게 숨까지 엷게 쉬던 벤즈그론은 곧 뻐근한 몸을 쭉 편다. 소리에 예민하고, 시력은 그리 좋지 않다. 낮은 등급의 용병이 마주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정도…. 마물의 사체를 유심히 살펴본다. 사체에서 치명적인 독이 나오는 등...
일 년 전 대련 엘피다는 귀네비어와 있는 시간이 그렇게 싫지 않았다. 다른 사제들과 있는 시간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엘피다는 꽤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그에 앞서 다른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도 멀쩡할 비위를 가지지 못했다. 악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양심이 아닌가? 그리하여 인간은 끝없이 부끄러워해야만 했고, 엘피다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
10달 전 잘 지내요, 친절한 사람. 이 삶을 사랑한 것은 당신 덕분이라서 작은 소리조차 남지 않은 걸음으로 서부의 차디찬 땅을 걷는다. 오염으로 차가워지고 굳어가는 몸에 열기가 훅 감돌았다. 손에 잡은 비도는 안개 자욱한 폐허에서도 예리하게 빛나고, 곧 마물을 찢어발긴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던 사람은 숙이고 있던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오염이 켜켜이 쌓여가는 몸이 무거웠다. 상념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흔들다가 걸음...
일 년 전 눈밭의 보석들 작은 아이는 눈밭을 바라본다. 흰 눈송이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그 위에는 푸르고 붉은 액체가 멋대로 퍼져간다. 상처 됨으로써 존재하고, 폭력으로써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보다 더욱 작은 두 아이의 손을 잡는다. 한데 모여있는 아이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로 함께 붙어 있는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옷자락이 나풀거린다. 그들은 ...
10달 전 슬퍼하는 날 모든 걸음이 지나치게 가볍다. 클루디는 낫을 치켜들고 마물을 베어 넘긴다. 오염에 지나치게 강했던 몸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냈고, 심장은 터질 듯 뛰었으며, 무기를 붙잡은 손은 아찔한 통증으로 물들어간다. 옷 소매가 찢어지고, 단단히 동여맨 붕대의 매듭이 풀려 팔 위에 어지럽게 그려진 균열이 우주색 빛깔로 빛난다. 희...
10달 전 더 나은 날들을 위하여. 흰 눈송이가 땅을 덮는다. 소리마저 죽어가는 흰 풍경에서 슬픔 따위를 느낀다. 백신을 찾아 오게 된 이 연구소에는 완성되지 않은 백신 수십 개가 있었다. 벤즈그론은 상념이나 다른 것을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손으로 백신 중 하나를 집어들고 주사기에 넣어, 그대로 팔에 꽂아 약물을 넣는다. 도려낸 눈 안쪽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
일 년 전 바람 부는 하늘 클루디는 숨을 길게 몰아쉰다.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클루디는 자신이 오염에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속절없이 안심하고 말았다. 상처투성이의 흰 손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틀어막는다. 전신에 홧홧한 느낌이 퍼진다.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우주색 빛깔이 뒤섞인 피가 흘러나온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채로 걸음을 천천히 내디딘다. 걷을 때 느...
10달 전 스물의 겨울 페리도트는 손을 더듬거리며 바닥을 짚는다. 차가운 눈의 감촉이 신체의 말단 부위부터 차갑게 만들었다. 푸르게 물든 손끝과 발끝에 더 이상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을 때, 페리도트는 온갖 악몽과 추억과 전생의 기억들이 뒤섞인 눈동자로 눈밭을 바라본다. 몸을 기어이 일으킨다. 어린아이가 보였다. 소중하게 간직하던 목도리를 풀어 아이에게 감아 주었다. 미안해요,...
8달 전 무제 굽 낮은 구두가 다 죽은 소리를 내었다. 결코 구두에서 날 리 없는, 묵직하고 낮은 소리.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걸음이 정확히 앞으로 향했고, 곧 마석 몇 개가 중력이상 현상을 일으켰다. 마치 바람에 휘날리듯 손에 든 우산이 부드럽게 손을 떠났으나, 우산과 손의 사이에 휘감긴- 보이지 않는 강렬한 힘은 우산이 멀리 떨어졌어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
9달 전 조용한 하루 일이 없는 프리뮬러의 하루는 고요했다. 사실, 그리 다채롭게 사는 편은 아니었다. 일을 할 때에는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 됐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혼자서 시간을 갖는 편이었다. 선천적으로 눈이 좋지 않았고, 시각 외의 모든 감각이 예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들을 찾게 되었다. 집에 물건을 줄이고, 집안의 동선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 6
8달 전 알아채기 힘든 것들 리티는 조사대의 팀장으로 있게 된 지 오래되었다. 20대 초반부터 조사대의 대장으로 있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됐다. 그들이 리티를 처음 보고 평가하는 것은 대개 그런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 냉혈한. 어찌 보면 그것이 맞았을지도 몰랐다. 리티는 언제나 이성적이었고, 흔들릴 줄 몰랐다. 조사대로 일하면서 그런...
7달 전 지난 생의 꿈 페리도트는 종종 꿈꾸었다. 꿈에서 페리도트는 늘 다른 사람이었고, 하지만 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떤 순간에는 신실한 사람이었고, 어떤 순간에는 이단자가 되었다. 감히 전생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는 날들의 기억들이 마치 얇고 투명한, 바람에 휘날리는 천에 영사기로 틀어놓은 것처럼 흐릿하게, 하지만 또한 선명한 감정을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가끔 ...
8달 전 무제 클루디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는 편이었다. 작은 체구와 가지고 있는 무기를 보고 약하다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았고, 클루디가 원하지 않는 방향의 배려를 해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루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키가 작은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워낙 말라 보였으니까. 이래서 용병 일은 어떻게 하는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루인은 잠시 손...
7달 전 지하 전투 조사원 몇 명이 지하를 부산스럽게 정리하고 있었다. 몇 명의 용병이 사고에 휘말려 지하에 떨어졌고, 조사원은 그들을 구출해 내기에 바빴다. 근방에 머무르던 조사원들에게 모두 연락이 갔고, 그곳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일오천야였다.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중력이상 현상을 이용하여 공중전을 이어가면서 주변을 정리했다. 마석이 부서지며 빛을 잃었고, 그로... 34
7달 전 告白 하늘이 어두웠다. 이곳에서 비가 내리는 일은 드물어서 별일이네, 싶었다. 언젠가 이런 하늘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슬펐던 것도 같지만, 지금은 슬프지 않았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매캐한 것이 먼지처럼 떠다니는 것이 비에 전부 씻겨 내려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피엔은 평범한 기분 속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돌린다. 익숙한 기척... 57
7달 전 평화로운 한낮 수아는 동부에서 권력 다툼에 자주 휘말렸다. 채 20살이 안 됐던 시절에는 휘말리는 것이 무척이나 심했다. 수아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는 해주사였으나, 그와 함께 지독한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갖추게 되면 시샘이 따라붙기도 했다. 어느 정도 크고 성숙한 인간이 되고 나서는 휘말리지도 않고 시샘도 잘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
7달 전 서부의 길목에서 아로니아는 서부를 자주 찾았다. 북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한정되어 있고, 특히나 고품질의 마물 부산물은 서부에서 더 얻기 쉬웠다. 흰색 긴 치마가 서부의 매캐한 바람에 흔들거렸다. 검은 머리칼을 매끄럽게 넘긴 아로니아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뜬다.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곳이 안전하긴 하지만 아이 혼자 있을 만큼 안전한 곳은 아닌데. 짧은 생각의 끝에 ...
6달 전 두 개의 검 이거 일났군 그래. 페룸은 한숨을 쉬듯 숨을 내쉬었다. 입을 닮은 부분에서 연기가 한 차례 새어 나온다. 마물이 즐비한, 혹은 마물의 개체수가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일상인 서부의 땅은 늘 위협이 가득했지만, 페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변에 일반인도 없으니 적당히 방어만 하며 조사대를 기다릴까 싶다가, 하지만 혹시 모르니 다 처리해 ...
5달 전 간단한 의뢰 용병 길드에서는 지정 의뢰가 자주 들어오는 편이다. 그리고 꼭 지정 의뢰가 아니더라도, 조건이 붙은 의뢰는 꽤 많았다. 그중에서도 호위 임무는 조건 한두 개가 더 붙곤 했다. 가장 많이 따지는 것은 역시 용병의 등급이었다. 5등급 이하의 용병들에게는 호위 임무가 적합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그 아래 등급의 사람들은 남을 지키며 싸울 수 없는 실력이거나,... 36
3달 전 되찾은 설원의 기억 앨리네는 침잠하는 의식을 느낀다. 기억을 찾으려 하는 것은 물속으로 불어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파도와 바다의 압력이 심장을 짓누르고, 그 사이로 수많은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앨리네의 감정이면서, 앨리네의 감정이 아니었다.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천천히 동화된다. 어쩌면 그건 불쾌한 감각일 수도 있었지만, 이미 여러 차례 의식의 심연에 발을 들여놓... 32
4일 전 비 내리는 날의 침입 하늘에 뿌연 구름이 몰려든다. 소피엔이 까치발을 들어 높이 있는 창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비가 오려나? 서부에는 비가 영 오지 않았지만, 드물게 비가 내렸다. 건조한 땅은 빗물을 잘 흡수하지 못해서 물난리가 나곤 했는데, 괜찮을까? 큰언니는 바깥으로 나갔고, 작은오빠는 살짝 열린 창문을 닫았다. 비가 올 것을 대비해 미리 닫아두는 것이었다. 아직 어렸던 소... 1
4일 전 놓고 온 것 림피투도 라줄룸. 광휘의 천상. 한 사람의 이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줄룸은 멍하니 하늘을 본다. 시리고 파란 빛깔이 아니라, 잿빛의 어둑한 빛깔이었다. 차라리 이런 빛이 나았다. 잠시 눈을 감는다. 옛적의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사실은 떠올릴 필요가 없던 일이었는데. 알면서도 떠올리는 건 사람의 바보같은 점 중 ...
4일 전 새벽 소식 라줄룸은 희게 내리는 눈을 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보다가, 손을 든다. 손 위에 함박눈이 쌓이다가 녹는다. 아, 이건 꿈이다. 그가 이제 다시 북부에 갈 일은 없었다.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건 라줄룸이었다. 이렇게 흰 눈을 맞고 있으니, 과거가 생각난다. 조각난 기억 속, 설원의 풍경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절대 잊히지를 않더란다. 그때가 아직...
일 년 전 잿빛 연기 아래서 우아한 궤적을 그리고 뼈를 천천히 갉아먹는 소리, 살덩이를 파먹는 것들의 움직임이 이 땅 위를 천천히 기어다닌다면,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무기를 꺼내들어 그것들을 단번에 갈라낸다. 그의 하얀 머리카락만큼 흰 대낫 위에 검붉은 살점과 피가 달라붙는다. 보석보다도 찬란한 붉은색 눈길이 마치 구슬처럼 매끄럽게 굴러가며 주변의 상황을 파악한다. 발광하는 것, 그리고 재앙의 전조라고 ...
4일 전 무제 부서진 유리관과 실험 도구들, 무너져 내린 벽의 너머로 햇살이 천천히 차오른다. 오랜만에 밝은 햇살이 드는 날이었으나, 리티나의 기분은 영 그렇지 못했다. 조사대는 마물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인간과,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운 이들을 파악하고 정리했다. 인간 복제를 한 이들은 들을 것도 없이 즉결 처분이다. 리티나는 우산에 묻은 피를 털어낸다....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