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 빛과 노래와 춤사위 검고 짙은 밤이 찾아왔다. 검은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과 구름들이 시원스럽게 쓸려 나가며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움직인다. 저기 먼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퍼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를 것.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그려냈을지도 모를 선율, 바람소리가 마치 이 찬란한 밤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퍼진다. 밤은 매일 찾아오지만 그 한가운데 있...
일 년 전 전투를 즐기는 법? 고통을 잃는다는 건 결국 길을 잃은 사람이 된다는 것.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눈앞에 섬광이 번쩍인다. 귀 안쪽에서 이명이 길게 늘어진다.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라그락시아는 잠시 바닥에 누워 있다가 죽 찢어진 왼쪽 어깨를 손으로 짚는다. 붉고 흰 파티클이 유성우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늘어지다가, 곧 찢어진 근육과 뒤틀린 뼈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상처를 낫게 했다. 곧 거대한 도끼가 날아들고, 순식간에 몸을...
일 년 전 눈밭 속의 족제비 흰색 눈밭에 폭 누워있던 비베는 팔을 휘적거리며 뒹굴뒹굴한다. 비베는 이 눈밭을 좋아했다. 마음이 갑갑할 때면 어김없이 이렇게 눈밭에 누워 뒹굴거린다. 그러면 걱정도 고민도 씻은 듯이 사라진다. 이 눈밭이 자신의 집이라도 된 것처럼 태평하게 있다가,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에 상체만 일으킨다. 새카만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완전히 일어나선 옷에 붙은 눈을 털...
일 년 전 데이트는 마멀레이드빛 길거리에서 헬렌은 작게 하품을 한다. 일 없이 여유로운 하루는 오랜만이었다. 최근에 정말 일이 많았다. 조금은 노곤한 하루였다. 긴 전투에 의한 부상이 다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에 전투에 나가는 것은 금지사항이었다. 작은 부상이 전투에 들어서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그저 하염없이 여유로운 날을 보고 있었다. 뻐근한 감각이 남아있는 어깻...
일 년 전 류트의 선율은 밤에 퍼진다 류트의 현을 손끝으로 누른다. 현을 튕기며, 경쾌한 음악을 연주한다. 가벼운 허밍으로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악기는 류트 하나뿐이었지만 여러 현악기가 어우러지는 것만 같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경쾌하고 신비로운 음악을 연주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아름답게 퍼진다. 카멜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뿐인 것은 아니었다. 카멜은 ...
일 년 전 나자르 본주 이 세상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그것이 단순한 물리적인 것만을 나타내는 것인가, 그 질문에 모든 인류가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좋은 것이 있다면 나쁜 것이 있고, 검은 것이 있다면 흰 것이 있으며, 좋은 것이 있다면 나쁜 것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반대편에 놓인 것이 없어서는 성립조차 할 수 있다. 선이 존재하기 위해선 악이 있어야 하며 평화가...
일 년 전 지워짐의 구원 기억을 지운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카멜은 턱을 괸 채로 생각한다. 발아래에는 연기 같은 구름이 닿고, 까마득하게 높은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무서우리만치 장엄하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행성을 떠나 본다면 티끌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지성체라는 것은 본디 티끌 같은 것에 정을 주도록 만들어져, 이 한없이 장엄하고 광막한 세상- 누군가의... 2
일 년 전 너네는 연인의 어린 시절을 보면 어떡할 거야? MBTI랑 반응 남겨줘_한헬렌 미약한 멀미감,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듯한 지독한 통증이 전신을 얕게 휩쓸고 지나간다. 한이나 헬렌에게 있어 이런 통증 쯤은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런 통증으로 인한 불쾌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한은 표정을 험악하게 구긴 채로 주변을 한 번 둘러본다. 마족의 힘에 휩쓸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뚝 떨어졌다. 나름대로의 상황 파악을 끝낸 뒤 주변을 몇...
일 년 전 장미산맥의 주인 희고 검은 장미가 불탄 대지를 뒤덮은 죽음처럼 피어난다. 잿빛이 휘몰아친다. 회색 바람이 길게 불어오고, 눈이 쏟아지는 장미정원은 이토록 짙은 빛깔을 가진다. 샤만트는 산맥의 위에 서서 생각한다. 누군가의, 혹은 어딘가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평생을 산다는 건, 평생을...
일 년 전 평온한 낮잠 헬렌은 노곤한 얼굴로 햇살을 쬐고 있었다. 햇살이 따뜻했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별빛을 닮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린다. 헬렌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매우 건강한 편이었고 활동량도 많은 편이었으나 유독 수면이 모자랐다. 긴장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마법사로 오래 지냈던 탓에 늘 각성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아무런 일도 없으면 햇살을 쬐는 고양이마냥 앉아서 휴...
일 년 전 탄광 속 카나리아 사람을 닮았으나 닮지 않은 것, 혹은 애초에 모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큰 눈을 깜빡인다. 새카만 눈의 가운데에는 붉은색 동공이 타오르듯 반짝거린다. 입에서 피가 물흐르듯 쏟아져 손과 팔토시, 그리고 발을 적시는 것을 무감하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 속부터 뭉근하게 아픈 것을 느끼고는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
일 년 전 하얀 카네이션 금속과 나무로 만든 펜을 잡는다. 유려한 손길로 주술진을 그린다. 신난 마음에 약간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받은 개인 의뢰이기도 했고, 의뢰가 터무니없이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을 자극했다. 분홍색 눈동자 위에 주술진이 비친다. 어둠 속에서 짙푸르게 빛나는 문양에 분홍색이 보라색으로 물드는 착각...
일 년 전 싫은 겨울 블랭크는 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바닥에는 뭔지도 모를 액체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찬찬히 눈을 감았다 뜨면, 곧 눈이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은 하늘이 보였고, 손끝에 닿는 금속의 감각은 서늘했으며, 온갖 비명과 환락이 가라앉은 역겨운 바닥은 미적지근한 피와 역겨운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숨을 내쉰다. 목 안쪽에서 텁텁한 금속 맛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킬 힘도...
일 년 전 행복한 놀이공원 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놀이공원은 끽끽대는 소리만 들렸다. 당장 무언가가 떨어지거나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었다. 한때는 희열과 웃음으로 가득했던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언제나 암운이 드리우듯 어두운 하늘에선 언제나 보슬비가 내리니, 그것도 무척이나 음산했다. 담력 테스트를 하고자 한 이들도 걸음을 돌리게 만드는 마의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의...
일 년 전 무제 상실과 체념은 손을 맞잡고 있었고, 그것은 분노와 혐오의 양식이 된다. 다이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던 아이는 처절한 울음과 설움으로 뒤덮인 채로 하루를 견디기만 했다. 가족이 죽었다. 이 시대에 가족이 죽은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모두가 각자 하나씩의 상실을 떠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건 다행이라는 말과, 나는 저런...
일 년 전 꽃들의 침묵 스카디는 길을 걸으면서 얼굴에 가득 내려앉은 피로감과 슬픔을 지운다. 햇살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퍽 익숙했다. 제 삶에 착색된 것을 미루어 두고, 빛을 향해 걷는다. 발걸음의 끝에는 곧 웃음이 떠오른다. “우리 어린이들, 잘 지냈어?” “우와아아, 선생님이다!” “선생님! 우리랑 놀러 왔어요?” “이제 안 바빠요? 많이 놀아줄 수 있어요?” 스카디는 무거운...
일 년 전 요정 치료 뮤켈은 눈을 감는다. 암실과도 같은 공간에선 약초 타는 냄새만 났다. 약초를 이렇게 태우고 있으면, 몸에서 긴장감이 전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약초를 태운다. 작은 불씨와 약초잎이 흩날린다. 그렇게 죽음같은 고요 속에서 약초의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안쪽의 어딘가에서 얕은 발소리가 들린다. 천이 움직이는 소리와, 조심스러운…. 너, 이번에도 또 나가면 ...
일 년 전 체념과 받아들임 카샤티마는 다정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잠깐의 안온, 짧은 웃음, 스쳐 가는 희망에 대해서. 나의 모든 것이자, 나의 일부였던 사람. 카샤티마는 그가 죽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계에 끌려간 인간이 얼마나 처절한 꼴이 되는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사용되는지, 어떻게 죽는지, 그리고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인간의 시체조차 농락당하는 악랄한 곳이었다...
일 년 전 찰나의 안녕을 고하며. 잘 있어요, 내가 사랑하던 세상이여. 이 세상의 오래된 신들은 세상을 사랑했다. 생명을 사랑하고, 대지를 사랑하며, 바람과 물결을 사랑했다. 죽음을 알기에 더욱 필사적인 생명들, 그 어떤 공포와 불안이 있어도, 확신이나 희망이 없어도 웃을 줄 알고 꿋꿋하게 나아가는 생명들을 사랑했다.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 별을 사랑했고, 달을 사랑했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신들은 이 모든 것들- 만물...
일 년 전 악신의 피조물 샤르망은 자아가 사라지는 감각 속에서 눈을 뜬다. 처음은 공포스럽다가, 이후에는 슬펐다가, 제 안에 남은 다정함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계속 자아가 뜯어 먹혔다. 샤르망은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울음을 쏟아낸다. 마족이라고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수천 개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수많은 마족들이 나쁜 것은 사실이었다....
일 년 전 찰나의 대화 이해할 수 없었어. 무엇에 대해서? 우리는 그 누구와도 공존할 수 없는 종족이라는 것에 대해서. 왜? 우리는 악신의 피조물이지. 자연스러운 생명이 아니야.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을 봐. 그리고 우리가 하염없이 아끼고 싶었던 것들을 봐. 우리 동족의 손에 죽은 그들? 그래, 그들. 우리들의 손에 죽은 그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어. 우린 그들과 본질적...
10달 전 섬광과 어둠 수많은 은색 섬광이 주변에 모여든다. 빛을 만들던 자는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면서 계속 어두워지는 주변을 밝혔다. 어둠은 빛을 집어삼킨다. 아무리 강한 빛이 있다고 한들 그것은 전부 암실의 작은 촛불처럼 흐릿하게 일렁거릴 뿐이었다. 아직 체력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이 공간에서 어둠에 오래 닿으면 안 됐다. 바닥도, 천장도 없는 검은색이 끝없이 일렁거린다....
일 년 전 이상하고 평온한 영원 수만 개의 천이 세찬 바람에 너울거린다. 아이들은 그 사이를 뛰논다. 수풀이 희게 드러난 발을 간지럽히고, 곧 옷의 끝자락에는 풀물이 든다. 순수하고 깨끗한 웃음소리가 퍼진다. 긴 메아리가 산을 타고, 강물과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흐른다. 흰 천이 신의 손길처럼 휘감긴 이곳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노래가 된다. 노래는 찬송가가 되고, 찬송가는 천에 고스란히...
10달 전 기적을 바라며 불쾌할 정도로 달큰한 향이 방안을 하염없이 떠돈다. 설탕 막대 14개와 비정제 깃털 3개를 닷새 동안 밤낮없이 끓이던 것이 원인이었다. 후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약까지 복용한 채로 큰 솥에서 약을 끓이던 케찰은 이미 수없이 열어본 편지를 다시 펼쳐본다. 편지에 새겨진 작은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보다 편지를 도로 접어 책상 구석에 놓는다. 진한 녹색 눈동자...
10달 전 새해 해돋이 어두운 밤에 하얀 입김이 수놓이듯 새어 나온다. 헬렌은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앉아 하늘을 본다. 별마저 숨은 깊은 새벽이었다. 새해 전날에 출장이라니. 헬렌의 친구는 운도 나쁘다며 무어라 했지만, 헬렌은 이런 날에 바깥에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혼자 나왔다면 조금은 외로웠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파트너와 함께 다녔으니까. 혼자 하기에는 위험하지만 여럿이서... 107
8달 전 Jules Pagte 마법은 기적을 일으키는 과학이고, 연금술은 기적에 간섭하는 과학이다. 고대의 한 연금술사가 남긴 유명한 격언은 마법사와 연금술사의 방향성이 되었다. 수많은 마법사와 연금술사는 이 말을 새기고 살아간다. 수많은 불가해가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밀이 풀렸다. 그리고 한 연금술사는 기적에 간섭하는 과학으로 많은 사람들을 돕는다. 사람을 돕는 것, 자신의 연금술로 많...
7달 전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샤만트는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건 샤만트가 가장 사랑하던 찰나였고, 그 찰나에는 수많은 소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지나갔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순간만이 샤만트에게 있어 유일한 고향이었다. 샤만트는 오로지 지키기 위해 이 땅, 장미 산맥과 산... 35
13일 전 신녀의 의무 머나먼 과거였다. 수많은 신들이 이 땅과 하늘에 있었고, 신들과 인간은 서로 손을 맞잡고 살아갔다. 신은 만물에 깃든 의지였고 빛이자 어둠이었으며 불이자 물이며 바람이었다. 그들은 법칙이었다. 하지만 그 법칙은 세상에 한없이 자비로웠고, 수많은 사람은 그 법칙을 존중하며 살았다. 신과 인간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으로 많은 것이 무너져 내렸다. 신들...
13일 전 불편하고 낯선 온갖 빛깔의 실험관이 즐비한 방 안에서, 미타렉토는 조용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갑고 소름끼치는 푸른 네온빛 눈동자가 인공조명을 받고 부자연스럽게 반짝였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서른 장째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미타렉토는 묵직한 철제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한다. 들어와. 열려있어. 짧은 정적 이후에 문이 열리고, 트레님이 모습을 ...
일 년 전 산맥의 주인과 작은 생명 샤만트는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것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었고, 샤만트는 그런 끝이 아주 멀리 있는 존재였다. 단순한 정령에서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난 것이 사랑하던 것을 지키기 위함이라,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무한한 시간은 샤만트를 영원히 이별하는 생으로 던져 놓았다. 평생을 산다는 것은 평생을 외롭다는 뜻과 다를 바 없다는 것...